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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현장에서 다시 꺼낸 <,> (06)

 

12 9, ‘대통령 탄핵이 가결됐다. 역사적인 성과로 기록돼 길이 남을 일이다. 매주 토요일 광화문과 청와대 일대를 가득 장악한 촛불이 이룬 승리이다. 우리 현대사는 ‘4.19’‘5.18’, 87 6월 항쟁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그런데도 또다시 2016민중총궐기함성을 외쳐야 하는 현실이다. 민란의 역사는 기존 질서의 모순을 대체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실패와 성공으로 구분되는 것은 민란의 주체가 확실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했는지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작은 성공은 있었지만 주체로서의 성공은 아니었던 셈이다.

 

19세기 청나라 말기, 격변의 시대를 풍미한 태평천국 민란은 결국 실패했다. 봉건왕조의 악행과 외세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근본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민중의 쾌거였지만 홍수전을 비롯한 지도부는 대안 이념의 실천을 철저히 구현하지 못하고 분열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민란의 역사는 새로운 대안을 잉태하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이념을 어릴 때부터 체득하고 있었던 쑨원 중심의 공화주의는 황제 시대의 종말을 끌어냈다. ‘성공한 홍수전마오쩌둥은 태평천국의 근거지와 지도이념을 자세히 연구한 끝에 홍군 대장정을 거쳐 신중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청나라 말기 1814년 광둥에서 태어난 홍인곤(洪仁坤)은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했는데 연이어 과거에 실패했다. 3번째 낙방 후 병을 얻어 와병 중에 꿈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노인으로부터 하늘의 계시를 얻었다. 홍수전이라 개명했으며 중국 최초의 중문 기독교 서적인 <권세양언(劝世良言)>을 탐독한 후 집안의 위패를 공자에서 하느님, 곧 상제(上帝)로 바꿨다.

 

홍수전의 행위는 세계관 자체를 바꾸는 엄청난 관념의 변화이자 청나라 말기의 혼란과 부조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태도였다. 배상제교(拜上帝)를 설립하고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 자칭했다. ()을 숫자로 풀어헤친 삼팔이십일(三八二十一)배상제교의 암호였다. 수전(秀全)은 아()와 발음이 비슷한 화(), ‘~이다라는 뜻의 내(), ()과 왕()으로 풀면 아내인왕(我乃人王)의 뜻으로 하느님이 보낸 구세주였다.

 

지방정부의 모순이 점차 가중되자 반청()을 기치로 내걸고 주변의 무장세력을 흡수해 금전촌(金田村)에서 민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금전 민란이 일어난 1851년은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지주계급에 대한 농민계급의 모순 강도가 첨예화된 시기이자 명나라 이후 끊임없이 이어온 농민 주도의 대규모 민란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탐관오리의 치부와 토지겸병, 고리대금업 성행은 물론이고 서방 열강의 침략으로 사상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일찍이 도래한 적 없는 강렬한 반항 정서가 펼쳐진 것이다.

 

홍수전의 금전 민란은 청 왕조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태평천국의 국호를 내걸었다. 홍수전은 구약성서의 모세 십계명처럼 십관천조(十款天) 제정하고 신성하고도 엄격하게 조직을 관리했다. 하느님 상제를 숭배하고 7일의 예배를 지키는 기독교와 효도할 것과 함께 살인, 불의, 음란, 약탈, 거짓, 욕심을 경계하라는 윤리까지 포함돼 있다. 엄격한 규율로 관리되는 태평 민란군은 곧바로 서남부 광시 일대를 점령한 후 대대적으로 군대와 행정조직의 편제를 단행했다.

 

천왕을 중심으로 책략에 뛰어난 양수청(杨秀清)을 동왕, 대규모로 합류한 장족을 이끄는 소조귀(萧朝贵)를 서왕, 홍수전과 동문수학한 풍운산(冯云山)을 남왕, 태평군의 용맹한 장수 석달개(石达开)를 익왕翼王으로 봉하였다. 청 왕조의 기년을 철폐하고 천력을 시행했으며 통치 제도이자 이념이 담긴 3가지 조령인 삼유()를 반포했다. 모든 전리품은 성고(圣库)에 공동 보관하고 재화를 사적으로 은닉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청나라 문화를 거부하고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허용했으며 관방 문서의 간행과 정보기구를 두는 등 초기 태평천국의 이념과 통치 방식을 만천하에 선언했다.

 

중국 남방을 기반으로 이념과 조직으로 무장한 태평군은 계림과 장사를 공략했으며 악양을 점령한 후 광범위하게 몰려드는 빈민 및 유민을 결집했다. 당시 강남 일대를 휘몰아치던 천리교(天理教) 민란과 연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장강 유역에서 발발한 염군(捻军)의 민란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853 3월 남경에 이르러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홍수전과 지도자 그룹의 기독교 사상과 대동 이념은 대규모 농민의 요구를 수렴했다. 원대한 통치 기반을 확대하고자 태평천국은 자급적인 소농 기반의 균빈부(贫富) 사상과 토지의 균등 분배의 토지개혁이자천하의 논밭은 모두 함께 경작한다는 정신인 천조전무제도(天朝田亩制度) 시행을 선포했다.

 

 

북경 천안문광장에 가면 광장 한가운데에 높이 37.94m의 인민영웅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 앞면에는 마오쩌둥의 서체로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 8글자가 도금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1949 9 30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 명의로 마오쩌둥이 초안을 잡고 저우언라이가 쓴 150자가 새겨있다. 건국할 때까지 3년여의 장제스 국민당 군대와의 전쟁, 30년여의 인민해방혁명, 지난 세기 1840년 이후 민족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대내외의 적과의 투쟁 속에서 희생된 인민영웅에 대해 천추에 길이 빛나라는 헌사가 담겼다.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발생한 1840년을 신중국 성립을 위한 영웅적인 인민 투쟁의 역사, ‘20세기적 민란의 출발로 인식한 것이다. 마오쩌둥을 비롯해 중국공산혁명가에게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 역사의 기폭제는 태평천국 민란이라는 인식이 아주 강했다.

 

1945 6월 마오쩌둥은 연안에서 진행된 중국혁명 순국열사 추도대회에서 아편전쟁 당시 무장조직인 평영단(平英)의 반영투쟁과 함께 태평천국 운동을 영웅적인 투쟁이라 밝혔다. 태평천국 운동에 대해 최후에 남경에서 청군에게 패할 때 단 한 명도 투항하지 않고 모두 불타 죽었는데 태평천국이 실패로 끝났지만 어떤 이도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홍수전을 평가하며 19세기 말 외세와의 충돌을 겪던 시기에 처음으로 서방 진리를 기반으로 투쟁한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공화주의자이자 삼민주의자인 쑨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쑨원 역시 홍수전의 사유제 철폐 사상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삼민주의 중 민생에 대한 입장은 곧 태평천국의 토지제도 속에 담긴 평균(平均)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홍수전의 평균은 토지문제뿐 아니라 건국사상으로 제시됐는데 어린 시절부터 태평천국 운동을 보고 듣고 자란 쑨원에게는 천하위공(天下为公), 즉 철저한 공화주의자로의 앞길을 열어준 기틀이기도 했다. 마오쩌둥 역시 공산혁명의 와중에 태평천국의 비타협, 불굴의 정신과 평균정책을 착안해 농촌에서의 사유제 철폐를 위한 인민공사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1964 11월 마오쩌둥은 태평천국과 관련해 지도자 문제를 거론했다. 지도자가 너무 많으면 그 혁명은 실패했다고 전제하며 태평천국의 경우, 홍수전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양수청과 함께 양권수립(两权对立)으로 인해 실패의 전철을 밟았다고 언급했다. 이때는 국가주석의 자리를 류사오치에게 넘겨준 후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서 불순한 자본주의 사상을 청산해야 한다는 사청() 운동을 제시하며 문화대혁명의 전조가 서서히 무르익는 시점이다. 반대파 숙청을 위한 명분이긴 했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오쩌둥은 역사로부터 얻은 교훈과 공산주의 사상을 접목해 신중국을 건국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청나라 말기 봉건적 통치국가와 외세와의 항전, 전국을 뒤덮은 새로운 사상과 실천인 태평천국 민란은 당시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의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성공한 홍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마오쩌둥도 태평천국 운동의 역사는 훌륭한 지침이었다.

 

우리도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의 처절한 투쟁을 시작으로 국내외 항일운동과 임시정부의 투쟁,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시대의 종말을 위한 항쟁과 87년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민란의 역사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민중의 몸부림이다. 이번 총궐기에 전봉준 투쟁단이 등장한 것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눈부신 경험이었다. 지금 우리의 민중총궐기역시 새로운 시민혁명의 깃발이자 전 민중의 지향을 제시하고 있다. 민란으로부터 배운 지도부의 출현과 민중의 요구를 철저하게 관철하는 대안 세력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 필요하다.

 

탄핵 가결 이후 광화문에 모인 열기와 청와대로의 진군 함성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더 커다란 희망으로 달려갈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이자 바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전 민중이 함께 춤추는 나라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 이순신과 세종대왕 사이에 민중총궐기 영웅기념비석을 새기면 좋겠다. 매일같이 민중의 춤사위 한마당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의 나라가 되기를 기대한다.



  • 민란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은 졸고인 <,>(2015, 썰물과 밀물)에서 인용하고 일부 내용을 고쳐서 기재한 것임을 밝힌다. ‘중국민중의 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은 중국 방방곡곡을 취재하면서 느낀 소회와 얻은 자료를 기초로 집필된 이야기 책이다민란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미래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잣대로서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