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각각 시계바늘이 똑딱거리며 ‘티베트항쟁’ 50주년 기념일인 3월 10일로 가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현장에 없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덧 국내언론사들은 현장 분위기는 아니지만 일촉즉발 같은 티베트를 대부분 보도한 것으로 보인다. 최고의 화제는 원자바오 총리의 ‘바오바(保八, 경제성장률 8% 유지)’ 등 경제문제이긴 하지만 중국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함께 한다는 뜻)가 때맞춰 있기라도 한 것처럼 티베트와 양회가 함께 거론되는 전문가 기고나 특파원 시론까지 합하면 긴장감을 꽤 읽은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싸의 티베트 사람들

 

얼마 전 대학로에서 티베트 라싸(拉)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우리의 걱정도 다르지 않았다. 라싸에 상주하고 있는 선배는 공안국으로부터 당분간 입경하지 말라는 경고성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선배는 아마도 이번에는 작년 못지 않게 무슨 큰일이 반드시 벌어질 듯하다며 티베트 사람들을 걱정했다.

 

2년 전 우리는 라싸에서 만나 며칠 동안 함께 여행을 했다. 포탈라궁과 조캉사원에서 함께 다녔으며 티베트의 젖줄인 야루창포(雅魯藏布, Yalu Tsangpo) 강을 건너 퍼밋(허가증) 없이 라마불교의 성지인 쌈예로의 1박2일 탐험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하는 사람과 사진을 찍는 여행객들의 부조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캉사원과 바코르광장 모습

 

티베트를 가 본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일반 ‘중국인’에 비해 다르게 살고 있으며 가난 여부를 떠나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전통이 훼손되고 억압 받는 가를 몸소 느끼게 된다.

 

포탈라 궁 관람 티켓을 예매하는 후문에 서 있는데 티베트의 젊은 친구들이 영어로 접근하는 모습도 경험했다. 2007년 7월 당시에도 긴장이 있었다. 몇 달 전 외국의 한 단체 주도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싸의 분위기는 그래도 그때는 다소 불편하고 비용이 더 들기는 해도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던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탈라궁 후문. 이곳은 다음날 티켓을 예매하려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당시 우리 일행 중 한 아가씨가 정말 재미있는 아이를 만났다고 자랑했다. 그러니 꼭 다시 함께 보고 취재하면 어때요? 라고 했다. 겨우 6~7세 정도인 여자 아이. 이름은 ‘깡골라모’라고. 매일 하루 두 번 조캉사원 앞 바코르광장에서 아침에는 오체투지를 하고 오후에는 민속 춤을 춘다고. 물론 여행자들로부터 돈을 받는다. 생계를 위해 아이는 사람들의 이목을 향해 티베트의 문화를 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깡골라모와 김리아씨

 

깡골라모를 소개한 그 아가씨는 당시 ‘티베트의 꼬마 유관순이에요’ 라고 했다. 그녀는 지금 여행기를 집필하고 있는데, 이 ‘꼬마 유관순’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동의를 구해 사진과 글을 소개한다.

 

조캉사원 근처를 헤매다가 어떤 꼬마 여자 아이가 오체투지를 하는 것을 보게 됐다. 조캉사원에서 터뜨리는 관광객들의 카메라 짓이 너무 혐오스러웠던 탓에, 저 사람들의 거룩한 노력을 카메라에 담지 않으리라 했는데, 그 꼬마 여자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담고 싶었다. 아주 작은 여자 아이인데, 장족(Tibetan) 전통 복장을 입고 오체투지용 가죽 앞치마를 앞에 두른 채, 자기 손바닥 크기 정도의 나무 판을 손바닥에 대고는, 두 손을 이마에, 코에, 가슴에 댄 후, 주르륵 미끄러지며 온 몸을 땅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면서 씹던 껌으로 풍선을 불고 있다. 다시 땅에 엎드리고 난 후, ‘휴~’ 하고 힘들어 하는 게 아니라 풍선을 크게 불어 대는 그 포스! 동행한 현수한테 말했다. "나 오체투지 하는 거 찍기 정말 싫지만, 쟤가 날 유혹하네"

 

그래서 그 아이한테 다가갔다. 마침 오체투지를 마치고 걸어가고 있었다.

일단 동의를 얻고 사진을 찍는 것이 좋을 듯 해.

"꼬마야, 너 참 예쁘다. 너랑 같이 사진 찍어도 될까?"

 

그리하여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얘가 생각 외로 부정적이지 않아서 대화를 좀 더 계속할 수 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

"깡꼴라모"

"장족 이름이네? 중국 이름은 없어?"

"없어..."

 

"대단해, 얘 중국 이름 없데. 장족 이름만 있데. 요새 아이한테 장족 이름만 지어주기 힘든데, 장족 이름만 있다는 건 얘가 민족의식이 뛰어난 집안에 속하거나 아예 교육을 받지 못한 하층 집안에 속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리아)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깡골라모(왼편), 전통 춤 공연을 준비 중인 모습(오른편 위)과 인형을 가지고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는 깡골라모(오른편 아래)

 

장족 이름뿐이라는 게 꼭 독립 의지라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오체투지와 전통 민속춤으로 생계를 위해 아침 저녁으로 나타난다는 깡골라모가 무척 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깡골라모를 만나지 못했는데 대학로에서 다시 만나서 다시 깡골라모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찡했다.

 

나는 라싸를 먼저 떠났지만 그 이후 깡골라모의 집을 찾아가 아이의 부모를 만났고 아이의 입양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곧 결혼하는 그녀는 라마 승려가 분신을 하는 등 점점 첨예한 전선이 형성되면 될수록 먹고 살 게 없어지는 티베트의 여린 영혼들에 대해 걱정이 많다. 깡골라모를 비롯 티베트의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티베트를 여행한 사람들 모두 이런 마음이 아닐까. 나 역시 라싸의 한 고아원에서 만난 깡골라모 나이 또래의 아이들 얼굴이 잊혀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행 중에 만났던 아이들 사진들을 다시 꺼내 보게 됐다.

 

! 티베트는 왜 중국의 소수민족이 되어 ‘지배 당하고’ 있는 것일까. 티베트의 아이들 가슴에는 어떤 희망이 자라는 것일까. 라싸를 비롯해 티베탄(Tibetan)의 역사가 살아 숨쉬던 곳들이 생각난다.

 

티베트 민족은 수도 라싸의 시장장족(西藏藏族)자치구 외에도 칭하이()성과 쓰촨(四川)성 일대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고 있다. 라싸를 가기 전 칭하이 시닝(西宁)에서 서쪽으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위슈(玉)장족자치주를 찾았다. 이곳 일월산(日月山)에는 당(唐)나라 태종의 딸인 문성공주의 사당이 있다. 공주는 서기 641년 장족과 한족의 단결(藏汉团结)의 선물(?)로 티베트의 토번(吐蕃) 국왕인 송첸간보(松干布)에게 보내졌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칭하이에 있는 문성공주 사당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칭하이 호수에서 만난 어린 소녀들

 

토번의 ‘번’은 고대 티베트 민족이 숭상하던 원시종교인 번(本)의 음이 변한 것이며 ‘토’는 ‘크다(大)’는 뜻으로 토번국은 당나라와 화친을 이룰 정도로 강성했다. 물론 라마불교는 그 이후 정립된 종교이긴 하지만 원시종교와 인도불교 및 당나라 등의 대승불교를 혼합해 티베트민족의 독특한 종교를 만들어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성공주 사당에서 30여분 떨어진 칭하이 호수에서 민속복장을 입고 춤을 추던 두 소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럿이 모여 사진을 찍길래 동영상까지 함께 찍었는데 알고 보니 그 옆에 서 있는 보호자 엄마가 돈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돈을 더 달라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을 못 알아듣고 겨우 몇 푼의 돈만 줬다. 나중에 사정을 듣고 얼마 되지는 않지만 더 주지 못한 것이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라싸에 와서는 시내의 한 고아원에서 티베트 아이들을 만났다. 나오미, 요셉, 에스더 등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정직한 율동이 떠오른다. 지금은 라싸 공안당국에 밀고한 사람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아니 잘 살고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싸의 고아원에서 만난 아이들

 

시내 산 능선에 있는 포탈라 궁 앞에는 라싸 시내를 가로지르는 대로가 있고 천안문광장처럼 커다란 광장이 있다. 그 곳에는 오성홍기는 하루도 쉼 없이 휘날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포탈라 궁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댈 때지만 사실 이 오성홍기야도 라싸에서 인상적인 피조물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포탈라 궁도 웅장한 모습만 볼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뼈와 피, 땀까지 함께 살펴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탈라궁 앞 광장에 나부끼는 오성홍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탈라궁과 버스와 자전거와 사람이 오고가는 대로


야룽창포강을 건너 서기 779년에 건립된 티베트 제일의 쌈예(桑耶) 사원을 갔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때 만난 한 아이도 생각난다. 라싸에서 1시간 버스를 타고, 다시 강을 건너는데도 1시간 가까이 이동한 후 트럭을 타고 가는 길이었다. 트럭 운전사의 아들이 아빠를 따라 나왔는데 둥근 눈망울을 하고서는 연신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이 너무나도 순수해 보였다. 바나나를 건네주니 맛 있는지 다 먹고서는 또 다시 낯선 이방인들을 응시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티베트의 젖줄인 야룽창포 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룽창포 강을 건너 쌈예 사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트럭 운전사의 아들

 
이 쌈예 사원은 서기 779년에 문수(文殊)보살의 현신이라 할 정도로 백성들에게 어진 왕이기도 했고 인도와 당나라 등과도 교류하는 등 불교를 부흥시키고 통합하는 데 노력했던 티쏭데우첸(赤松德, 742~797)이 건립한 것.

마을 곳곳에 어린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저녁에 우리 일행이 함께 식사를 할만한 곳을 찾고 있는데 식당 안에서 한 꼬마 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나타났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이 장난도 치긴 하지만 경계의 눈초리가 서글펐다.

그 옆 가게에서는 아이들이 당구대에서 놀고 있었다. 중국의 시골마다 이런 모습이 없지 않긴 하지만 이 티베트 시골골짜기에까지 어른들의 놀이가 한낮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한다. 당구대가 있는 가게 옆은 쌈예 진() 정부가 있는데 변함 없이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쌈예 진 거리에서 만난 꼬마 아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쌈예 거리에서 당구를 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쌈예 진 정부에 나부끼는 오성홍기


우리는 해발 3700미터 지점의 윰브라캉 사원도 찾았다. 기원전 2세기경 티베트 왕조 최초의 왕으로 천신의 아들(天神之子)이라 불리며 신화 같은 역사적 인물 냐티첸뽀(
)의 궁전으로 알려지고 있는 티베트 역사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윰브’는 어미 사슴(母鹿)이라는 뜻이고 ‘라’는 뒷다리(后腿), ‘캉’은 신전(神殿)을 뜻한다. '어미사슴 뒷다리처럼 생긴 궁전'이라는 뜻인데 송첸간보가 사원으로 개조해 문성공주와 함께 여름 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윰브라캉 사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윰브라캉 사원을 순례하는 티베트 사람들


마니통(
转经) 옆에 길쭉한 항아리처럼 생긴 화로 속에는 마른 나무장작이 하염없이 타면서 연기를 뿜고 있다. 장족 할아버지 할머니가 두 손을 꼭 잡고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모습이 너무 정겹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들부터 살아온 티베트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아이들은 또 이어가게 될 것이다.
라싸에서 만난 사람마다 우리가 직접 살아볼 수 없었기에 그저 책으로 겨우 이해하는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와 비교하기도 한다. 정말 티베트의 독립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가 우리 독립운동사를 진한 가슴과 맑은 머리에 담아 이해하듯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좀더 세심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칭하이 호수에서 만난 두 소녀. 라싸의 고아원에서 만난 아이들. 쌈예로 가는 트럭에서 만난 아이. 쌈예 마을 거리의 아이들 모두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아직 그들에게는 독립이 무엇인지 싸움이 무엇인지 굳이 뼈저리게 느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계조차 절실한 그들이 이다음에 자라나면 좀더 ‘좋은 삶’이 보장되는 곳에서 살 수 있을까. ‘티베트의 꼬마 유관순’이라 불리던 깡골라모는 잘 지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