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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11회 지린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지린(吉林)은 만주어로 쑹화강을 끼고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쑹화강은 백두산 천지를 발원으로 해 장장 2천 킬로미터를 흘러가는 강.

 

지린 성 수도인 창춘(長春)은 일본제국주의 만주국이 세워졌던 곳이며 광개토대왕의 비석이 있는 지안(集安) 일대는 고구려 흔적이 많다. 옌볜(延邊)에는 조선족자치주가 있으며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창바이산(長白山)이라 부르는데 최근에 산 바로 옆에 공항이 생겨 백두산관광이 더 활기를 띨 전망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항일운동 유적지도 많은 곳이다.

 

마지막 황제이자 일본이 세운 만주국 황제를 역임한 푸이와 고구려 및 우리 조선족 동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지린으로 가보자.

 

1) 集安 광개토대왕 비석을 꼭 몰래 찍어야 해?

 

지안에서 택시로 이동하는 것이 시간도 줄이고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족 동포 운전기사가 반갑게 맞아준다.

 

먼저 장군총(將軍塚)으로 갔는데 입장료가 30위엔이니 꽤 비싼 편이다. 입구를 지나니 거대한 무덤이 보인다. 장군총 옆 왼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커다란 돌로 겹겹이 층을 이룬 무덤이 아주 튼튼해 보인다. 돌 사이마다 이름 모를 풀들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데 저절로 날라와 피어난 것이 아니라 꽃씨를 일부러 뿌린 것이라 한다.

 

최근에 역사를 유행처럼 떠든다. 역사는 늘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인데도 중국 동북공정에 느닷없이 대응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지극히 감정적인 접근을 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든다.

 

장군총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시내가 다 보인다. 그만큼 장군총이 높다는 것인데, 좁은 곳에서 나와 우뚝 잠시 서 있으니 말 달리던 고구려 전사들의 우렁찬 기상이 벌판을 달려 오는 착각에 빠진다.

 

다시 차를 타고 광개토대왕 비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곳도 입장료가 30위엔이라 이상해서 물어보니 지안에 있는 관광지는 모두 30위엔이라고 한다. 중국사람이 광개토대왕 비석과 왕릉만 보려고 설마 30위엔을 내고 올까 싶었는데 아주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를 중국에서는 하오타이왕베이(好太王碑)라고 부른다. 유리창문으로 사방을 막아놓고 밖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으나 안에서는 찍지 못하게 한다. 역시 감시원이 있으며 안내원은 비문의 글자에 대해 설명해준다. 글자 수가 모두 1,775자라고 설명하는 것을 듣다 보니 약간 화가 났다. 도대체 왜 못 찍게 하는 것 인가. 우리나라 역사를 빼앗긴 듯해 살짝 울화가 치민다. 캠코더를 꺼내 몰래 좀 찍었다. 당당하지 못하고 '몰래카메라'를 찍었다는 것도 화가 날 일이다.

 

장군총(왼쪽 위), 뷰파인더에 비친 북한아이들(왼쪽 아래), 광개토대왕 비석(오른쪽)

 

산이라 하기에는 낮은 언덕 위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왕릉이 있다. 왕릉 속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 한 쌍이 나란히 놓여 있는데 무덤 위에 중국 돈과 한국 돈이 또 나란히 섞여 있다. 중국사람들은 이렇게 돈을 던지는 것이 하나의 습성이다. 우리나라 천원 지폐 몇 장이 있는 것을 보니 한국사람들도 뭐 좋은 것이라고 중국사람들을 따라 이렇게 던지고 그러는 것일까 답답하다. 그다지 보기 좋지 않다.

 

왕릉을 나와 다시 고분을 보자며 택시를 몰고 갔다. 역시 입장료가 또 30위엔이다. 특별히 고분을 더 연구할 일도 없어 들어가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옛날 어릴 때는 저 무덤 위에서 뛰어 놀았는데 지금은 관광지가 됐네요라고 한다.

 

고분에 들어가지 말자고 하니 운전기사가 조금 난감한 듯 북한 땅 보이는 곳으로 가겠냐고 한다. 아주 가까운 곳이고 아주 가깝게 북한 땅이 보인다니 가 볼만 하다. 차로 시내를 벗어나 10여분 가니 압록강이 나타났다.

 

압록강 너머 강변에 아이들이 놀고 있고 엄마들은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아하고 부르니 강 너머에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아이들 다섯 명이 강변에서 소꿉놀이를 하는지 아주 포근한 모습으로 놀고 있다. 손 흔드는 모습까지 잘 보이는 아주 가까운 곳이다. 아담한 아이들의 손, 우리 아이들과 언젠가는 맞잡고 흥겹게 하나가 될 그런 아름다운 손이다.

 

철조망 속에 숨어있는 고구려 국내성 성곽 앞에 차를 세운다. 수풀 속에 묻혀 성곽인지 아닌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로 많이 훼손돼 있다. 가지런하게 박혀있는 돌들은 아마 최근에 조성해 놓은 듯하다.

 

예전에 이곳에서 뛰어 놀았는데 국내성터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때부터 보존했으면 이렇게까지 훼손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도 한다. 오래된 돌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쌓은 성곽의 형태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저 평범한 돌이 아닌 역사의 빛나는 돌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   長春 마지막 황제의 일생 앞에 눈시울이 뜨겁다

 

창춘 시 동북쪽에 위치한 웨이만황궁박물관(滿皇宮博物院)을 찾았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만나보려고 한다. 파란 하늘과 한적한 매표소 그리고 택시 한 대, 그 너머 살짝 박물관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하늘을 가르는 구름이 사뭇 청아하다.

 

산책로를 걸어 들어가니 번체로 흥운문(興運門)이라 써 있는 박물관 정문에 이른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깔끔한 단청과 회색 빛 벽돌로 둘러싸인 궁내부(宮內府)가 나타난다. 만주국 시절 부속실인데 지금은 역사박물관처럼 꾸며져 있다.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푸이는 황궁을 쫓겨난 후 만주국의 황제로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자신이 거처하는 건물 이름인 지씨(緝熙)’ 두 글자를 직접 썼다고 한다. 바로 청나라의 강희(康熙)제를 되살려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이니 만주족 청나라를 회복한다는 의지를 담았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한 후 마지막황제로서 자금성에서 거주하는 동안 완롱(婉容)을 황후로, 원슈(文繡)를 황비로 맞아들인다. 마지막황후 완롱은 질투가 심했으며, 원슈를 시기하고 저주했다고 한다. 14살에 푸이의 황비로 들어간 원슈는 자금성을 나와 생활의 곤란을 겪다가 황제와 역사적인 이혼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지씨러우 2층은 당시 푸이가 생활하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거실과 침실도 깨끗하게 꾸며져 있다. 아편에 빠져 있는 완룽의 모습은 왠지 음울하고 처량해 보이기도 하다.

 

마지막황제의 지씨러우(왼쪽 위), 완룽과 원슈(왼쪽 아래), 황제에서 평민까지(오른쪽)

 

친민러우(勤民樓)는 만주국이 업무를 보던 공관이다. 집무실도 있고 회의실도 있고 간혹 공연을 즐기는 문화공간도 있는데 황제와 황후의 의자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1937년에 푸이는 완롱을 못마땅하게 여겨 귀족 출신의 탄위링(譚玉齡)을 부인으로 맞이 한다. 탄위링은 솔직하고 순수한 성격으로 푸이의 호감을 샀지만 돌연 1942년에 병사한다. 푸이는 자서전이며 반성문이기도 한 <내 인생의 전반부(我的全半生)>에서 '가장 사랑했던 위링'이라 토로하기도 했다.

 

탄위링이 죽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혈통의 여자를 푸이과 결혼시키려 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푸이는 1943년에 평민 출신의 리위친(李玉琴)을 새로운 부인으로 맞이한다. 일본 관동군이 붕괴할 때 민중 봉기군을 피해 리위친과 함께 도망치기도 한다. 이후 전범으로 체포된 푸이가 있는 뤼순감옥에 찾아가기도 하고 서신 왕래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리위친은 푸이와 이혼의사를 밝힌다.

 

푸이는 특사로 석방된 후 평민이 됐고 중국정부의 소개로 항저우 출신 간호사인 리슈셴(李淑賢) 1962 4 30일 결혼한다. 1967년에 푸이가 사망하기까지 그들은 꽤 다정하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망인 리슈셴은 1997년 사망한다.

 

웨이만황궁박물관에는 황제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從皇帝到公民)라는 마지막황제 푸이의 일생을 기록한 전시관이 있다. 참으로 가슴이 찡해진다. 그의 일생이 참으로 파란만장하게 느껴진다.

 

1945 8 15일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자 션양으로 피신했으나 곧 소련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하바로브스키에 수감됐다가 중국으로 호송된다. 푸이는 전범관리소에서 교육받고 소위 정신개조 과정을 거친다.

 

1959 12 4일 마오쩌둥 주석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돼 베이징식물원의 노동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중국공산당 정부를 지지하는 '신중국 옹호' 발언과 맞바꾼 새로운 평민으로서의 삶이자 마지막 여생이기도 하다.

 

3살에 황제가 되었지만 자금성을 살아서떠나게 된 유일한 황제였다. 만주국의 황제이었다가 다시 평범한 평민으로 돌아온 푸이. 그리고 '신중국'에 대한 반성과 지지 성명. 모든 과정에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푸이의 마지막 여생 8년은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만주족 마지막황제가 보낸 여생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1967 10월 푸이는 병사한다. 4번 결혼해 5명의 부인을 두었던 푸이. 불운했던 자신의 운명처럼 그의 부인들은 미치기도 했고, 도망가기도 했으며 돌연 죽기도 했다. 마지막 아내인 리슈셴과 함께 서 있는 사진 속에 담긴 행복한 미소가 오히려 가슴을 아프게 한다.

 

3)   延吉 진달래보다 더 예쁜 진달래를 연기한 여배우

 

옌지의 옌볜과학기술대학에서 옌볜가무단이 특별히 준비한 연극을 관람했다. 먼저 <선녀를 찾습니다> 공연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돈을 벌기 위해 부부가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을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했다. 한국 대중가요의 가사를 바꿔 재미있게 구성한 것이 재미있다. 약간 낯설기도 하고 익숙해지기도 한 옌볜 말투와 어울려 아주 흥겨운 장면이다. 한국의 세련된 무대에 비해 촌스러워 보일 수 있으나 감칠 맛 나는 연기와 관중과 호흡하는 애드립으로 인기를 많이 끌었다.

 

또 하나의 작품은 <오줌싸개>이다. 옌볜 사회에서 꽤 유명한 국가1급 배우인 리옥희와 김미화(국가3)가 출연했다. 설날이 다가오는데 고향의 늙은 어머니는 도시에서 사업하는 큰 아들네 식구가 오기를 기다린다. 저능아인 딸 역시 오빠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아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오지 못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상심한다. 비록 모자라지만 오히려 효성스런 딸로부터 괴로움을 달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에 '못 생긴 나무 산을 지키고 있구나' 라는 멘트가 관중들의 가슴을 찌른다. 현장에서 볼 때는 평범한 스토리이구나 생각했는데, 몇 번 다시 보니 아주 섬세하고 진한 감동이 느껴진다. 두 번 세 번, 맛 볼 때마다 더 깊어지는 된장국처럼 잘 생기고 큰 거목은 다 장작이 되었겠지만 '못 생긴 나무 산'이야말로 꿋꿋하게 산의 생명 줄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선녀 공연(왼쪽 위), 오줌싸개 공연(왼쪽 아래), 천년아리랑 공연(오른쪽)

 

옌볜가무단의 <천년아리랑> 공연을 보기 위해 하루를 더 기다렸다. 1946 3 10일 조선의용군제5지대 선전대가 모태인 옌볜가무단이 최근에 선보인 <천년아리랑>이 공연된다는 것을 알게 돼 일정을 더 연장하면서 기다렸다.

 

막은 북춤인 '장백 웨침'과 함께 시작. '장백 메아리'는 아름다운 곡선이 돋보이는 여성스런 소고 춤이며 둥근 악기처럼 살랑 돌아가는 몸짓은 나긋나긋한 아낙네의 몸짓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혼'은 붓과 부채 속에 담긴 선비의 유연하고 기개가 있는 장면이니 정열적이고 힘찬 남정네의 혈기라 하겠다.

 

진달래는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꽃이다. <천년아리랑> 속의 '진달래'는 너무나 아름다워 진홍빛으로 물든 눈을 비비고 또 비벼야 한다. '진달래' 무용을 연기하는 많은 배우들 중에 진달래 꽃 속에서 진달래보다 더 예쁜 꽃이며 희망을 온몸으로 연기한 배우는 박연화이다. 너무 아름답고 황홀해 공연이 끝난 후에 가무단 단장에게 '진달래를 연기한 배우가 너무 이쁩니다' 했더니 '우리 단 250여 명 배우들 다 하나같이 모두 이쁩니다' 라고 한다.

 

'물동이 춤'은 머리에 물동이를 얹고 살금살금 춤을 추는데 그 모양이 예쁘다. 신랑 각시가 혼례를 올리는 날을 춤으로 구현했는데 아기자기하면서도 화려하다. 가마 타고 시집 가는 모습도 좋고 서로 맞절하고 장난 치는 모습도 즐거워 보인다. 동네 사람들 모두 나와 축하해주고 한바탕 신나게 노는 장면이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담았다.

 

아낙네들은 '장고' 춤으로 서서히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남정네들은 '상모' 춤으로 하나가 된다. 커다란 한마당을 이루니 혼신을 모아 무대를 한마음 한 뜻의 '민족 한마당'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연길에 가시면 꼭 <천년아리랑>을 보기 바란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꼭 공연이 성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천년의 아리랑.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상에 젖게 된다. 그리고 또 떠나야 하지만 진달래의 모습이 아른거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4)   延吉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백두산 박사'로 통하는 옌볜과학기술대 최창흡 교수께서 발굴하신 백두산 가는 길은 기존 안도현과 이도백하를 거쳐 가는 코스 대신에 용정, 화룡, 남평, 숭선, 광평을 거쳐 가는 코스다. 두만강 바로 옆 비포장 군사도로를 따라가는 길이다.

 

시간은 6시간으로 조금 더 걸리지만 바로 앞에서 북한 땅을 볼 수 있다. 백두산 발원지에서 시작한 두만강 줄기를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셈이다. 점점 좁아지는 물줄기를 따라가는 적막한 도로이지만 백두산과 북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북한 함경북도 무산 시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다. ‘조선과 중국의 경계석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새벽에 출발해 한 시골도시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는데 정말 꿀맛이다. 아침을 먹은 식당 바로 건너편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보고 있다.

 

북한 무산(왼쪽), 백두산 입구(오른쪽 위), 천지(오른쪽 중간), 장백폭포(오른쪽 아래)

 

중국 영토로 백두산을 올라가야 하니 '장백산'이라 적힌 정문에 도착했다. 산 아래에서는 천지의 날씨 상황을 알 길이 없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지를 과연 볼 수 있을까 걱정이다. 만약 천지로 올라가는 차량이 운행되지 않으면 장백폭포만 보기로 했다.

 

천지 간판이 보이는 입구에 도착하니 지프차가 운행 중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최창흡 교수의 주장대로 해발 2,749미터인 정상까지 올라가는 지프차는 무서운 속도로 산을 타고 오른다. 날씨는 오락가락,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제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 3대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지프차에서 내리니 온통 주위가 안개로 자욱하다. 눈도 아직 녹지 않았고 날씨는 영하 10도니 쌀쌀하다 못해 한겨울입니다. 서서히 천지를 향해 걸어 올라가는데 뜻밖에도 갑자기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놀랄 일이다.

 

천지는 아직 꽁꽁 얼었지만, 웅장하고 늠름한 자태는 마음을 확 녹이고도 남는다. 세차게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는 되는 듯 춥다. 1분 이상 손을 내놓을 수도 없을 정도. 하늘은 맑은데 비가 내렸다 그쳤다 난리다. 하지만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백두산의 진한 감동은 시야에서 떠날 수 없다.

 

1시간 가량 머문 백두산 정상이지만 천지 앞에 서니 시간도 멈추는 듯하다. 수 천년 이어온 조선 민족의 거산 앞에서 1시간도 감지덕지였다. '겨레의 숨소리' 백두산. 그리웠던 만큼 더욱 알찬 사랑의 숨결이 느껴진다.

 

천지 주변 산봉우리마다 눈 여겨 봤으며, 바위에도 살짝 손길을 대 보기도 한다. 언젠가는 우리 동포들 모두 손잡고 천지에서 감동의 통일노래를 합창할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감상에 젖는다.

 

산을 내려가는 길 또한 오르는 길처럼 험하다. 하늘과 산들이 멋지게 조화를 부리지만 역시 백두산에 오니 생기가 넘친다.

 

백두산 천지를 보고 내려와 장백폭포를 보러 간다. 온천수가 하얀 김을 뿜는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웅장한 폭포가 나타난다. 폭포는 하늘에서 내려와 비를 뿌리는 듯 보인다.

 

카메라 앵글에 빗물인지 폭포수인지 자꾸 묻어난다. 폭포는 무서운 기세로 흘러 강이 되고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흘러가 따뜻하게 머무는 폭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백두산에 다시 세차게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 폭포가 떨어지는 듯 하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