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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17회 간쑤 2 동서양의 길목에 초승달로 떠오른 오아시스


5) 장예 張掖 초저녁 공원은 시민들의 노래연습실


치롄산을 넘어 버스를 타고 14시간 만에 겨우 간쑤 성 장예에 도착했다. 곧바로 기차 역으로 달려가 다음 날 티켓을 예매할 생각이었다. 장예에서 하루 묵을 생각을 바꿔 다시 새벽 1시 19분 행 밤 기차표를 끊었다. 아쉽지만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래서, 시간이 서너 시간 남았다. 다시 시내 중심지인 중구러우(鐘鼓樓)로 갔다. 종각이 있는 곳이니 번화가이다. 누각 위로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새 떼가 활개를 치고 있다. 해가 저물 때면 이렇게 새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지는 모르지만 다소 스산하고 이상한 느낌이다.


사거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길이 보인다. 동쪽 길은 둥다제(東大街), 서쪽 길은 시다제(西大街)이니 북쪽 길은 베이다제(北大街), 남쪽 길은 난다제(南大街)이다. 참으로 중국 사람들의 길 이름 짓는 방법은 간편하고도 쉽다.


베이다제로 천천히 걸었다. 해발 4천 미터의 치롄산을 넘어 북쪽으로 왔던 관성이었던가 보다. 그런데, 어디선가 민속악기 소리가 난다. 시내 한 작은 공원으로 가니 노래하고 춤 추는 사람들의 저녁 풍경이 정겹게 보인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온 시민들이 잔뜩 모였다. 피파(琵琶)라고도 부르는 만도린과 활로 소리 내는 두 줄 현악기인 얼후(二胡)를 비롯해 피리의 일종인 디즈(笛子), 두드리는 현악기인 양친(揚琴), 태평소라고 하는 쒀나(嗩呐), 생황이라 하는 다셩(大笙) 등 온갖 전통악기들이 다 모였다. 거기에 서양악기인 바이올린까지 곁들여 연주하고 있다.


위구르족의 2줄 현악기이면서 손으로 튕기는 두타르(獨它爾)라는 악기도 언뜻 보인다. ‘두’는 두 줄을 말하며 ‘타르’는 현악기라는 뜻이다. 물론 비슷하게 생겼지만 3줄 현악기도 있다고 한다. 페르시아 문화를 지닌 위구르족의 신장자치구가 부근이기 때문에 이곳 장예에서도 볼 수 있는 가 보다.


연주에 맞춰 주민들이 모여 민가를 합창하고 있는데 옆에 가서 악보를 보니 제목이 아버지란 뜻의 푸친(父親)입니다. 그야말로 서민 야외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합동 공연이 아닐 수 없다.


장예 시내 연주(왼쪽), 부채춤(오른쪽 위), 야시장(오른쪽 아래)


그 옆에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역시 악기 반주에 맞춰 부채 춤을 추고 있다. 정확하게는 부채를 든 아주머니와 그냥 손 사위만으로 움직이는 아주머니가 반반 이다. 아주머니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아저씨들도 간혹 함께 부채를 들고 춤 추고 있다. 여가를 즐기는데 남녀가 따로 있을까 만은 남자가 부채를 들고 춤을 추니 약간 어색하긴 하다.


근처 야시장에서 맥주와 민물가재인 롱샤(龍蝦)를 곁들여 간단한 요기를 했다.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잠도 자지 않고 야식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경제 사정이 나쁘지 않은 도시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기차 역으로 가서 밤기차를 기다리는데 여전히 악기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기적소리에 서서히 묻혀 가지만 실크로드의 도시 장예에서 춤 추고 노래하고 연주하는 모습을 봤더니 피로도 풀리는 듯 하다.


6) 둔황 敦煌 둔황 시장에서의 오후 한때


간쑤 성의 서쪽 끝인 둔황은 애초에 문화체험 계획을 짤 때 필수코스였다. 사막 위에 세운 도시이면서 실크로드의 중심이며 동서양의 길목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중간에 도로 위에서 버스 점검을 하느라 잠시 멈췄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저 황량한 벌판뿐이다. 다시 국도로 따라 안시(安西)터미널에서 잠시 정차할 때 배가 고파 삶은 계란을 사서 먹기도 했다. 안시를 지나니 드디어 사막 한복판을 달린다.


둔황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정말 ‘이 멀리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록새록 피어난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 찬란한 교류를 꽃 피우고 실크로드라는 반짝이는 이름까지 얻게 된 곳이니 둔황 시내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둔황 톨게이트(위쪽 왼), 시내 공예품시장(위쪽 오른), 목판 낙타(아래쪽 왼), 둔황 음료(아래쪽 오른)


쉼 없이 흩날리는 사막 모래는 여전히 그 옛날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버스 차창에서 바라보노라니 이런 황폐한 토지 위에서 사람들이 살아왔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까 싶은 상념에 젖기도 한다.


터미널에 도착해 지도 한 장을 사고 거리를 거닐었다. 둔황 시내는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도시이다. 외국 관광객들이 주로 집결하는 밍산루(鳴山路)를 거쳐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조금 가니 페이톈(飛天) 시장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버스 회사 이름도 그렇고 페이톈이란 말이 둔황에는 많이 있다. 바로 이곳의 석굴인 모가오굴 벽화에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의 무용을 하는 그림이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공예품을 파는 시장 골목이 죽 이어져 있다. 정말 이곳이 둔황이구나 하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실크로드와 낙타, 둔황 불상을 직접 송곳으로 나무 판에 새기고 있는 모습도 신기하기만 하다. 나무 모양에 따라 둥근 것, 네모난 것 등 다양하다. 돌 위에도 그리고 비단 천, 조롱박에도 그림을 그려서 팔기도 한다. 역시 어디에 그리는 가 보다 무엇을 그리는 가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예품들을 구경하고 있는 갑자기 은근하게 들려오는 악기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가만히 보니 바로 쉰(塤)이라는 악기인데 동그란 돌에 대여섯 개 뚫린 구멍으로 음계를 만들어내는 악기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쉰으로 드라마 대장금 주제가를 연주하고 있다.


시장에는 서역 냄새가 물씬 풍기는 먹거리도 많다. 우리 말로 수육이라고 하면 적절한 루러우(鹵肉)를 파는데 재미있는 것은 가게 이름이다. 바로 왕팡즈(王胖子)이니 성이 왕씨인 뚱보라는 뜻이라 혼자 속으로 웃었다. 가만 보니 그냥 수육이라기 보다는 삶은 고기에 야채와 양념소스를 넣어 함께 버무리는 요리인가 보다.


살아있는 닭과 비둘기도 판다. 생선도 팔고 과일이나 야채도 많다. 장을 볼 시간인지 사람들도 많다. 다리도 아프고 저녁도 해결할 겸 자리 하나를 잡고 앉았다.


둔황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싱피쉐이(杏皮水)가 있어서 하나 시켰다. 무엇보다도 음료수를 차게 마실 수 있으니 참 시원하고 맛있다. 이 지방에서만 나는 특산이라고 하는데 싱피는 살구나무 껍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빵 속에 고기를 넣고 마치 햄버거와 비슷한 러우자빙(肉夾餅) 하나도 먹었다. 맥주도 한잔 했는데 한 병에 10위엔이라 자리 값 치고는 좀 비싼 편이다. 햇살이 저물어가니 야시장에 점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서역까지 멀리 왔더니 밤 9시가 넘어도 해가 지질 않고 여전히 대낮이다.


7)   둔황 敦煌 모가오굴의 보물을 헐값에 담아간 프랑스인


6월 말의 둔황 날씨는 아주 덥다. 정말 잘못하다가는 일사병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 주변이 왜 사막인지 이해가 간다.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가오굴(莫高窟)이 있다. 사막 한가운데로 난 도로를 가로 질러 한 시간가량 달려가니 세계적 보물이라는 찬사에 빛나는 둔황의 석굴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정말 관광버스가 많다. 역시 세계문화유산에 어울리는 혼잡함이다. ‘모가오’라는 말은 ‘사막의 높은 곳’이라는 말로 모가오(漠高)라 하다가 사막이라는 모(漠)와 발음이 같은 모(莫)로 변형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답게 입장료가 160위엔으로 아주 비싸다. 아마도 내노라 하는 중국의 그 어떤 곳보다도 비싼데다가 가이드가 따라 붙으면 20위엔을 더 내야 한다. 게다가 카메라, 캠코더는 물론이고 가방조차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 가방을 맡겨야 하는데 다시 보관료도 내야 한다. 거의 강매라고 볼 수 있다.


가이드에게 특별요금을 내면 더 많은 곳을 관람시켜 준다고 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사기에 가깝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관람해, 꽤 감명 깊었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막막하다. 3곳의 석굴만 공개돼 있다고 하니 웅장하고 세밀한 불교문화라는 세계적 찬사를 어떻게 호흡할 지 걱정이다. 그 외 많은 동굴은 다 나무문으로 막았고 자물쇠로 굳게 닫아걸어서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문화재 보호 차원이겠지만 입구를 시멘트로 꽉 발라놔서 섬찟할 정도이다. 아직도 연구 중이고 보존의 필요가 있으니 그렇긴 하겠지만 굉장히 난감했다.


그래서인지 중국 3대 석굴인 윈강석굴이나 룽먼석굴에 비해 감동이 그다지 깊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산과 강이 함께 조화를 이룬 룽먼석굴이나 은근한 자태와 영롱한 채색이 아름다운 윈강석굴에 비해 좋은 느낌을 받지 못한 것은 이런 지나친 통제 때문이다.


천여 개의 동굴이 있다고 해 천불동(千佛洞)이라 부르는 이 모가오굴의 역사적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크로드의 허시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에 자리잡고 16국(十六國)과 북조(北朝), 수(隋), 당(唐), 오대(五代), 하(夏, 서하)와 원(元) 나라를 거치며 군사적 요지이면서 동서양의 교류 거점으로 숭불정책의 상징인 곳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기원전부터 흉노(匈奴)와 토번(吐蕃)도 이곳을 도모했다고 한다.


발굴된 492개의 석굴과 4만5천 평방미터 넓이에 불상과 벽화가 화려한 빛깔을 띠고 있다고 한다. 불교예술이 꽃 피던 당나라 시대 작품들이 가장 주목 받고 있다는데 화려한 채색으로 전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이곳은 각종 문서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제17굴인 장경동(藏經洞)에는 신라 승려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발견됐다고 한다. 아쉽게도 20세기 초 프랑스 동양학자인 폴 펠리오(伯希和)가 다 수집해 가버렸다. 물론 프랑스 인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비롯해 많은 서양인이 이곳의 보물을 가져가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펠리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펠리오는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아랍어, 이란어 등 무려 13개 국어를 소화하는 언어 천재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 하노이의 중문과 교수로 있던 1906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약 2년 동안 중앙아시아 일대를 탐사하는 도중에 둔황에 이르렀다. 펠리오는 이 자료를 토대로 10여 년이 흐른 후 프랑스 파리에서 둔황석굴의 역사적 가치를 소개한 도록(圖錄)을 발간했다고 한다.


둔황 모가오굴 입구(왼쪽), 모가오굴 모습(오른쪽 위), 여행자의 쉼터(오른쪽 아래)


모가오굴은 남북으로 1.6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굴이다. 막혀있는 동굴, 그리고 일련번호가 줄줄이 붙여져 있는 굴 속에는 펠리오가 다 가져가지 못한 진귀한 예술이 자연 그대로 남아 있다. 비록 학자들이나 일부 특별 관람객 외에는 보기 힘들긴 한다.


당시 모가오굴을 지키던 관리 책임자는 이 고귀한 자료들을 헐값에 다 넘겼다고 하는데 우매한 관리자와 이를 통제하지 못한 시스템도 문제지만 영악한 서양인의 눈매가 자꾸 상상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1시간 동안이나 석굴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나왔는데도 왠지 허망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매번 사진과 영상으로 담다가 머리와 가슴 속에 담으려니 영 쉽지 않다. 석굴을 나와 가장 높은 석굴인 9층 높이의 제96석굴 앞에서 그저 석굴의 웅장한 느낌만 반추하고 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길거리를 걷다가 서양식 레스토랑이 있어서 들어갔다. 존스 인포메이션 카페(John’s Information Café)라는 곳이다. 이곳은 여행가이드 북에도 소개된 곳인데 서양사람들 입맛에 딱 맞는 분위기이다.


차 길 옆에 있어서 약간 소음이 있긴 하지만 야외식당이고 답답하지 않아 좋다. 테이블마다 장미 한 송이가 있으니 상큼한 느낌도 든다. 치킨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값도 싸고 주인도 친절하다.


한 없이 느리게 저녁을 먹으면서 쉬었는데도 날이 저물지 않는다. 밤 9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노을이 지는 곳 둔황. 노을은 또 너무 붉어서 기분이 묘하다. 세계최고의 보물로 손꼽히는 모가오굴을 분명 들어갔다 왔는데도 별로 마음 속에 남아있지 않아서 그런지 붉은 노을 앞에서 그저 무덤덤하다.


8)   둔황 敦煌 동서양의 길목에 초승달로 떠오른 오아시스


둔황에서 오아시스가 있는 밍사산(鳴沙山)으로 갔습니다. 둔황에서 남쪽으로 불과 5킬로미터 떨어졌으니 아주 가깝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니 20분만에 도착한다.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려면 입구로 들어가 다시 차량을 타고 한참을 가야 한다.


밍사산은 사람들이 사막 모래를 밟으며 지나가면 ‘모래가 소리를 내며 흐른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그만큼 사막 산도 꽤 높다. 동서 40킬로미터, 남북 20킬로미터에 이르는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다. 해발은 1650미터 정도이나 가까이 가서 보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등산로가 가파르게 보인다.


밍사산에는 위에야취엔(月牙泉)이라는 오아시스가 있다. 밍사산에 둘러싸인 작은 샘인데 그 생김새가 초승달처럼 생겼다. 위에야(月牙), 달과 이빨이라고? 초승달을 말한다.


오랫동안 마르지 않는 샘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 위에야취엔은 아쉽게도 최근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인공적으로 물을 흐르게 한다.


밍사산의 모래(왼쪽), 위에야거(오른쪽 위), 사막의 오아시스(오른쪽 중), 밍사산 낙타(오른쪽 아래)


초승달의 진면목을 보려면 아마도 저녁 무렵이나 밤에 와야 할 듯싶다. 위에야취엔의 석양은 정말 장관이라고 한다. 밤이 되면 요조숙녀의 입술 같은 위에야취엔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니 둔황에 가면 꼭 밤에 가는 것이 좋겠다. 저녁 6시 티켓을 예매하지 않았다면 하루 더 묵으며 밤새 사막에 머물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파란 하늘과 간혹 양념 같은 흰 구름 외에는 온통 사막이다. 앙상한 가지만이지만 줄기차게 꿋꿋해 보이는 나무 몇 그루도 이곳의 진면목이 아닐 수 없다. 10위엔 아끼느라 장화를 빌리지 않고 사막을 걸었더니 신발 속으로 모래가 자꾸 들어간다. 온몸이 찌는 듯한데 발바닥까지 완전 사우나 한증막에 들어온 느낌이다.


위에야취엔 옆 위에야거(月牙閣)로 갔다. 오아시스 옆에 누각도 있으니 아마도 누군가가 여기에서 머물며 초승달처럼 빛나는 샘 앞에서 시라도 지었을 듯싶다. 그러고 보니 여가수인 톈전(田震)의 <위에야취엔>이란 노래가 떠오릅니다. ‘하늘의 거울이고 사막의 눈(它是天的鏡子, 沙漠的眼)’이라고 비유했는데 정말 그럴 듯하다.


위에야취엔에서 우리 드라마 <선덕여왕>이 촬영됐다. 드라마에서 초승달 같은 오아시스가 나오는 것을 보고 이토록 멋진 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궁금했다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밍사산 사막은 낙타와 사륜모터자동차를 탈 수 있다. 낙타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꽤 영화적이다.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실크로드 상인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사륜모터자동차를 탔는데 모래로 뒤덮인 사막을 넘는데 그 속도가 꽤 빠르다. 조금 후에 갑자기 직접 운전을 해보라고 한다. 부릉부릉 거리며 신나게 잘 달렸는데 한쪽으로 확 기울더니 차가 쓰러지는데 무지 불안하다.


다시 사막 산 위에서 내려오는 길에 운전사 뒤에 앉아 캠코더를 들고 찍었다. 가파른 길을 거의 날아서 달리는 장면은 너무 빠르고 위험해 찍을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이제 다음 여행지 우루무치로 떠날 시간이다. 버스로 10시간 이상 가야 하니 미리 밥을 든든하게 먹을 요량으로 두리번거리는데 한글로 ‘한국여행자들의 여행기록이 있습니다’ 라고 써 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테이블이 네 개뿐인 작은 식당인데 정작 주인은 우리 말은 못하고 일본어를 좀 한다. 2002년 7월부터 한국여행자들이 남긴 방명록이 있는데, 그걸 읽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밥을 다 먹고 일어나려는데 여행 중인 한국 학생을 만났다. 그 역시 혼자 여행이고 다음날 우루무치로 온다고 한다.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제 우루무치로 간다. 미처 다 털지 못한 밍사산의 모래가 여전히 신발 안에 남아서인지 자꾸 가렵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