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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21회 산시(섬서)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


 

허난 성 산현(陝縣) 평원 서쪽을 예로부터 산시(陝西)라 한다.

 

<서경> 우공구주도(禹貢九州圖)에 의하면 옹주(雍州)에 속하며 중국의 시조라 일컫는 염제와 황제의 탄생지라 전해지며 전국시대의 패자인 진 나라의 기반이기도 하다.

 

서주, , 서한과 당나라의 도읍으로 베이징, 난징, 뤄양과 더불어 중국 4대 고도인 시안이 산시 성의 수도이다.

 

시안은 원래 호경(鎬京)이라 불렸는데 한나라의 유방이 관중(關中)을 도모한 후 오랫동안 통치해 안정을 꾀한다(長治久安)는 뜻으로 장안이라 불렀다. 실크로드의 출발지이며 최근 중국정부의 서부대개발의 중심도시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1)   린퉁 진시황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

 

새벽기차를 타고 아침 7시에 중원의 '장안'으로 불리던 옛 도읍지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기차 역 앞은 사람들로 참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병마용(兵馬俑, 빙마융)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2006년에 한번 왔던 곳이라 버스 타는 곳을 쉽게 찾았다. 1시간 가량 달린 버스는 종점에 도착. 진시황 동상이 있는 광장은 병마용으로 가는 입구이다.

 

세계적인 유물이라 자랑하는 병마용박물관으로 가려면 걸어가도 되지만 비가 조금씩 내려 공원 차량을 타고 올라갔다. 표를 사고 들어서니 비가 내리는데도 거대한 규모의 1호 갱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서체가 단정한 <진시황병마용박물관> 비석 뒤로 보이는 1호 갱 입구를 들어서니 멋지고 장엄한 모습의 병마용 갱이 등장한다. 사진으로 한두 번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갱이다.

 

이 갱은 마차병과 보병이 함께 편성된 부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쪽을 정면으로 갱 앞쪽의 3개 열은 선봉부대이고 서쪽은 후방부대로 뒤쪽 방향으로 서 있다. 좌우 양 끝의 1개 열은 좌우로, 즉 남쪽과 북쪽을 향해 있다. 가운데 부분에 있는 무사들과 마차가 주력부대이다.

 

1호 갱은 1974 3월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이 엄청난 보물이 2천 년의 허물을 벗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문화대혁명 시기.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 주도로 언론을 동원, 이 병마용이 발견된 지 불과 1주일 만에 '진시황의 병마용'이라 선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시안이 고향인 평범한 건축기술사 천징위엔(陳景元)이다.

 

당시는 문화혁명 말기로 정국이 혼란한 시점이었다. 중앙집권 통치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느낀 천징위엔은 평생을 바쳐 연구하기 시작했다.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그의 주장은 2005 12, 중국 관영언론인 신화사를 비롯한 중국의 대부분의 언론들이 보도해 큰 파문을 일으킨다.

 

1호갱(윗쪽), 진시황 조각상(아래쪽 왼), 입사용(아래쪽 중간), 머리 잘린 병마용(아래쪽 오른)


천징위엔은 진시황 시기 100여 년 전 진나라 소왕이 어머니인 진선태후(秦宣太后) 미씨(米氏)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진시황이 아닌 진소왕이 고향인 초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한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진선태후는 바로 현재의
'병마용'의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 <사기>를 근거로 진선태후는 진시황 이전 시대의 진소왕의 생모로 '초나라' 사람이었기에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옷 색깔 등이 '진나라'가 아닌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306, 진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선태후가 섭정했고 임종이 가까워지자 신하에게 순장을 지시했으나 진소왕은 순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조각한 채 순용(殉俑)했던 것이다.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통해 자신의 생모가 평생 돌아가고자 하던 고향인 '초나라'로 귀향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만 담았다고 한다.

개관 이래
4천만 명 이상이 다녀간 곳이며 1호 갱에만도 6천여 건이나 되는 병마용 유물이 있으니 정말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클로즈업으로 병마용의 이곳 저곳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기원전 시기에 이렇듯 아름다운 모양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감탄이 저절로 생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천장 곳곳에 비가 새고 있어서 놀랐다. 그토록 자랑하는 박물관을 비가 샐 정도로 관리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병마용의 모습은 그 생김새와 동작이 아주 다양한 편이다.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른 표정과 자세가 그대로 묻어있다. 대부분 군복을 입었지만 갑옷을 입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자연스럽게 손을 차려 자세로 서 있기도 하지만 손을 살짝 들고 있는 것도 많다. 말들도 차이가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옷 색깔이다. 천징위엔의 주장에 따르면 진시황은 통일 후 통치를 위해 옷을 모두 흑색으로 통일했다. 그런데, 병마용의 옷을 보면 전체적으로 붉은 빛이나 빛이 다소 바래긴 했지만 녹색 빛이 남아있는 전투복 상의에 자주색 빛깔이 군데군데 드러나는 바지 차림이다.

병마용이 2천년 이상의 세월을 땅 속에서 숨쉬고 있으면서도 그 고유의 자기 색채를 유지한 것이 놀랍다. 당시에는 순장이 많았다고 하는데 진소왕이 굳이 흙으로 병마용을 구웠으니 이렇듯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흙 속에 영혼을 지켜온 것이 아닐까 싶다

전투 부대의 행렬이지만 간혹 보면 그 배치가 군대라고 보기에는 다소 느슨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병마용이 몇 개 보인다. 갑옷 속을 뚫고 총알이라도 뚫고 지나간 듯하다.

갱 속에는 좌우 사방에 감시원들이 서 있다. 그렇지만 마음껏 사진과 영상을 찍어도 된다. 감시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병마용을 다 담아도 된다. 최대한 줌으로 클로즈업해서 병마용 속의 마음까지 담아보려고 애를 써본다.

진시황은 군대뿐 아니라 문자를 비롯 복장, 도량형 등 모든 정치 및 사회문화적 제도를 일률적으로 통일했다. 하나로 통일된 느낌이 아닌 제각각 서로 다른 병마용에 푹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병마용은 1호 갱 외에도 2호 및 3호가 일반인에게 개방돼 있다. 4호 갱을 비롯해 많은 병마용은 아직 발굴 중이라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이 묻혀 있을 까. 어떤 면에서는 전국시대 최후의 승리자인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기 100여 년 전 소왕이 아무리 통일의 밑거름을 쌓았다고는 해도 이토록 방대한 병마용을 만들었다는 것도 다소 의문이기는 하다. 물론 아직 중국역사학계는 진시황의 병마용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결코 수정하고 싶지 않은 입장이기도 하다

병마용 3호 갱으로 갔다. 오목할 요()자 형 모양의 무덤 속은 네 필의 말, 한 대의 마차와 68개의 도용만 발굴된 520평방미터의 자그마한 갱이다. 약간 어두워서 무덤 곳곳을 세심하게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목이 잘리고 형체가 부서진 채로 그대로 있어서 오히려 보기 좋다. 정리하고 정돈한 것보다 더 드라마틱해 보인다.

말 뒤에 몇 미터 떨어져서 양 팔을 앞으로 벌리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말이 네 필이니 병마용도 네 명인데 그 동작이 다 다르다. 두 개는 양 손을 주먹 쥐고 뻗어있고 두 개는 왼손은 펴고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뻗어있다. 뻗는 각도도 다 각각 다르고 자연스럽다. 아쉽게도 세 개는 머리가 온전하지만 한 개는 목이 달아나 있으니 안타깝다

3호 갱에서 2호 갱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멍회이친차오(夢回秦朝)라는 이름의 사진촬영소가 있다. 병마용과 함께 진나라 시대로의 꿈결같은 회상을 해보라는 의미이다.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병마용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2호 갱은 6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중국 최대규모로 1300여건의 병마용, 마차 80량을 비롯 수많은 청동병기가 출토된 곳이다. 규모도 굉장히 크고 넓지만 무덤 속 병마용도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떨어진 목이 그대로 나뒹굴기도 하고 부스러기들도 그냥 방치한 듯 쌓여있다.

무릎 쏴 자세의 궤사용(跪射俑)과 서서 쏴 자세의 입사용(立射俑)과 말을 끌고 있는 안마기병용(鞍馬騎兵俑), 중무장한 군리용(軍吏俑)을 비롯 군사용(軍士俑), 장군용(將軍俑), 포용(袍俑), 개갑용(鎧甲俑), 어수용(御手俑) 등 다양한 형태의 병사용이 발굴됐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다양한 모습을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 자세나 동작들이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사람의 자세와 동작을 본 떠 만든 감각이 아주 놀랍다.

2호 갱 옆 복도에는 출토된 병마용 중에서 그 상태가 비교적 완전한 것을 전시하고 있다. 유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전체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병마용을 찾은 사람들이 꽤 오래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입사용의 자세는 마치 무술을 하는 자세와 비슷해 흥미롭다. 태권도 기마자세와 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3곳의 병마용 갱을 두루 돌아보는데 참 오래 걸렸다. 기원전에 이토록 방대한 규모의 무덤이 중국 학계의 주장처럼 진시황의 그것인지 아닌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정부가 역사를 왜곡하는데 아주 능수능란하기에 더욱 이 병마용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는 것이 꼭 필요하다.

천징위엔의 말처럼 2천년 만에 병마용이 우리에게 되살아왔듯이 역사의 진실이란 꼭 밝혀지리라 본다. 2번 병마용을 방문하고 나니 천징위엔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정말 사실이라는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이렇게도 아름답고 훌륭한 조각품 '병마용'에 담긴 효성스런 진소왕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2)   시안 西安 엄숙한 후이족 사원에서 만난 아이들

 

시안 시내에는 후이족 사원인 청진사(清真)가 있다. 후이족은 서기 7세기 중엽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남부 해안을 거쳐 시안이나 카이펑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기 13세기에는 몽골족의 서쪽 침공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의 무슬림들이 대거 중원으로 이주해 정착한 후 지금의 후이족이 됐다.

 

중국에는 도시마다 청진이라는 말이 붙은 사원이나 식당이 많다. 청진이란 말은 후이족을 상징하는 말인데 아라비아말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에 처음 등장하며 명나라 주원장이 쓴 글에서 이슬람을 지칭했는데 이후 후이족의 고유한 대명사로 사용했다고 한다. 청진이란 곧 중국의 이슬람이나 후이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중국에는 도교사원이나 불교사원, 그리고 유교의 사당과는 다소 다른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받은 청진사가 또 하나의 종교 사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후이족은 중국소수민족 중 하나이지만, 인구가 900만 명에 육박하니 소수민족 중에서는 꽤 다수민족이라 하겠다.

 

실크로드가 세계무역의 중심통로가 되자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후이족들이 광범위하게 중국으로 넘어온다. 중국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닝샤에는 자치구도 있다. 현재 시안에는 약 5~6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청진사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청진사는 얼핏 보면 여느 중국의 사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건물 지붕이나 벽면의 모양이 늘 보던 것이다. 아마도 이슬람문화와 중국문화가 서로 교류해 결합된 형태, 이슬람교가 중국에서 현지화된 형태라고 보여진다. 이질적인 모습을 가급적 감추고 한족문화와 소통하고 타협하며 살아야 했던 후이족의 종교생활과 그 문화를 잘 보여준다.

 

청진사에 만난 아이(왼쪽), 외국인 관광객(중간), 청진사 입구(오른쪽)

 

청진사는 당나라 때인 서기 742년에 건축됐다. 이후 송, , , 청나라를 거치면서 몇 차례 중건돼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체 외양은 중국 한족문화형식을 기반으로 했으나 사찰 내부의 모습은 엄격하게 이슬람교의 제도에 따라 조성됐다. 겉과 속이 서로 다른 것이다.

 

맨 입구에는 푸른 기와로 만든 벽이 하나 서 있다. 그 벽을 지나 가운데 길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누각과 정자가 색감도 그렇지만 구도도 안정적이고 주변 나무들과 어울려 자연친화적이어서 그런지 아주 포근하고 조용한 사원이다. 금연인데다가 이렇게 나무가 많으니 정말 공기가 맑고 상쾌하다. 더구나, 그 흔한 향 예불도 없으니 금상첨화이다.

 

중앙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청진사 현판이 걸린 누각이 보인다. 누각을 지나면 용 문양이 있고 천감재자(天監在茲)라고 새겨진 돌 패방이 나타난다. 패방을 지나니 한 아이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어 시선을 따라가니 셩신러우(省心樓)이다.

 

누각을 지나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다. 가운데 길에 있는 건물이 다 뻥 뚫려 있어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다 보인다. 젊은 남녀는 문고리를 만지고 두드리며 둘러보고 있다.

 

그리고 패루와 정자가 일체화된 독특한 구조의 이전()이 나타난다. 가운데 정자는 6각형이고 양쪽의 정자는 3각형으로 3개의 정자가 나란히 이어진 모습이 굉장히 특이하다. 봉황이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라 펑황팅(鳳凰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정자를 지나면 바로 종교의식을 치르는 건물이어서 서둘러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새 우짖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서쪽 하늘로 해가 지기 시작하고 새들이 철사 줄 위에 앉아 계속 지저귀는 새들이 참 많다.

 

한참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고 새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왠 꼬마 아이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한다. 아빠가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들어왔고 자기를 도와서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저 다 보고 나서 함께 나가자고 했다.

 

넓은 광장이 나오고 가운데 넓은 건물인 다뎬(大殿)입니다. 무슬림들은 예배장소를 '모스크'라 부른다니 여기가 일종의 '모스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본당의 크기는 600평방미터에 약 500여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안을 보니 맨바닥에 앉아서 종교예배를 하도록 돼 있다.

 

하여간 이 귀여운 아이들이랑 본당을 두루 살펴보다가 돌아 나왔다. 왼편으로 관리사무실이 있는데 그곳을 지날 때 아이가 손을 꼭 잡더니 보폭에 맞춰 몸을 숨기며 지나간다. 그리고 인사를 하더니 사라진다. 하여간 뭔 사연이 있겠지만 노는 짓이 귀여운 꼬마아이들입니다.

 

다시 청진사 입구에서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손에 물을 묻혀 다른 아이 얼굴에 대고 장난 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청진사는 후이족 무슬림의 종교사원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낙타를 타고 온 아라비아 상인들의 후예이자 중국 현지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후이족이 자신들의 종교활동을 위해 만들었다.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도 후이족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고 그들의 종교활동을 보장해주었다. 비록 자신의 문자를 가지지 못한 민족이지만 천년 넘게 중국에서 살아가는 후이족의 사원을 만났다.

 

3)   시안 西安 한국드라마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저녁을 먹다

 

시안은 동서남북으로 성곽이 조성돼 있고 성 안이 번화가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면 매번 성문을 드나들어야 한다. 서부대개발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시안의 활기찬 거리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호텔이나 건물도 고풍스런 분위기로 꾸며져 있어 시안에 가면 왠지 번성했던 당나라의 현대판 거리를 보는 착각에 빠진다.

 

시내 중심가에 구러우와 중러우가 있다. 마침 중러우 앞에 일본 NHK가 촬영을 하고 있다. 중러우에서 구러우 쪽 하늘을 바라보니 흐린 하늘에 햇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홍등이 잔뜩 걸린 건물은 밤이면 더욱 환하게 조명이 빛나는 식당들이다.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들도 많이 있다.

 

구러우 북쪽으로 넘어가면 청진사 시장이 있다. 그야말로 종합시장으로 갖가지 특산품과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곳이 있어서 이곳 저곳 둘러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다. 매실로 만든 음료인 쏸메이탕(酸梅湯)을 시원하게 해서 팔기도 한다.

 

포도(葡萄), 콩소(豆沙), 살구씨(杏仁), 참깨(芝麻), 호두(核桃), 대추소(棗泥) 등을 재료로 만든 팔대괴나 십대괴를 보면서 과일 이름을 배우기도 한다. 하얀 실처럼 늘어나 은사탕(銀絲糖)이라고도 부르는 룽쉬쑤(龍須酥)도 있다. 생 과일도 많지만 말린 과일도 곳곳에 보인다.

 

시장에서 청진사로 들어가는 좁은 길에는 공예품을 파는 가게가 꽉 들어차 있다. 갑자기 어디서 개구리 소리가 들린다. 가만 보니 자그마한 나무통 속에 밀가루를 넣어 찐 빵을 만들어 파는데 겉에 개구리 무늬가 있다. 개구리 소리는 가게 옆에 매달아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이 길가에 앉아 대나무 줄기로 동물을 만들어 팔고 있다. , , 사마귀 같은 것인데 대나무로 만들기 좋은 동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파는 가게 앞에서 인상적인 소녀 얼굴이 한참 시선을 끈다. 비단 위에 그린 그림도 있는데 대가 집 규수가 피리를 부는 모습이다. 그 옆에 만도린도 오랜만에 본다.

 

좁다란 길 양편으로 갖가지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전국 어디를 가나 비슷한 모양을 판다. 그렇지만,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따지고 보면, 능력껏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게 장사라면 중국상인들만큼 그 타고난 판매 테크닉이 뛰어난 민족도 없을 것이다.

 

중국친구들(왼쪽 위), 거리의 후이족(오른쪽 위), 시안 시내(왼쪽 아래), 후이족(오른쪽 아래)

 

마침 중국친구가 전화가 왔다. 중러루 옆에서 만나기로 했다. 몇 달 전 칭다오 라오산 여행 길에 만나 자오저(趙哲)가 시안에 왔으니 꼭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시간이 나서 거리를 걸었다. 신화서점 부근이다. 거리에 서서 길거리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활기차 보인다. 오징어꼬치를 먹는 곳에는 정말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 만두도 팔고 중국식 햄버거도 있다. 사람들 사이로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이기도 한다.

 

싱바커(星巴克), 즉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기다렸다. 스타벅스 커피 잔 옆에 제가 쓰던 모퉈뤄라(摩托羅拉), 모토롤라 핸드폰을 두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든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전 세계의 브랜드가 이미 중국에서 생활 속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안 시내 쇼핑거리에 가면 정말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없는 게 없을 정도이다.

 

자오저는 친구들을 잔뜩 불러모았다. 한국 친구가 왔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는 불렀다고 한다. 마침 주말이라 모두 모이기도 좋았다. 유명 샤브샤브, 훠궈 체인점에서 맥주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한국드라마와 연예인들을 좋아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친구도 있다. 베이징에서 경극을 전공한다는 여학생은 배우지망생이며 권상우와 <내 이름은 김삼순>을 좋아한다. 베이징에 오면 경극 취재를 도와준다고 했는데 언제가 꼭 다시 만나자고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너도 나도 시안에 오면 꼭 다시 만나자고 연락처를 적어준다.

 

중국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드라마와 연예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애정표현을 하기도 한다. 정말 푸짐한 저녁을 함께 한 이 젊은 친구들을 만나러 다시 시안에 가고 싶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