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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쌍십이사변'이라고 불리는 12월 12일 새벽, 장쉐량은 서북군 양후청과 공모해 시안사변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당 현종과 양귀비(양옥환)가 놀았다는 화청지 뒤쪽 얕은 산자락에 기거하던 장제스를 체포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시안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장제스의 독려로 서북군과 동북군은 마오쩌둥의 연안 홍군을 향해 진격했을 것이며 산베이(섬서성 북쪽) 일대는 포화가 난무했을 것이다. 대장정을 거쳐 안정적인 근거지를 확보한 공산당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후 아마 다시 감숙성이나 내몽골로 쫓겨났을 것이다. 제2차 국공합작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중국공략은 훨씬 손쉽게 진행됐을 것이 분명하다.


정말 장쉐량과 양후청의 ‘기습’은 ‘신의 한 수’라 할만했다. 적어도 당시 인민들의 지지를 끌어올리고 있던 공산당에게는 절묘한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시안사변은 당시 정국을 흔드는 사건이었으며 더불어 장쉐량과 양후청을 일약 세계적 뉴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시안 화청지 뒷산의 장제스 공관


시안 화청지 뒷산의 장제스 공관


시안사변을 일으킨 시안 시내 장쉐량 공관의 사무실


시안의 장쉐량기념관에 전시된 사진으로 장쉐량, 양후청, 장제스가 나란히


션양에 있는 장쉐량 옛집


션양 장쉐량 옛집에 있는 사진


사변은 ‘평화’적으로 해결돼 항일 국공합작으로 이어졌지만 ‘트리플A형’ 장제스의 ‘눈엣가시’ 두 사람은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쉐량의 연금생활은 장제스의 ‘마지막’ 부인 쑹메이링 덕분에 50여년이라는 엄청난 기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중국 호사가들의 ‘저작거리’의 관심이 둘이 ‘만리장성’의 하룻밤이라도 쌓았는지 쑥덕거릴 정도로 연정이 아니었더라면 오히려 벌써 불귀의 객이 됐을 것이다. 장쉐량에 가려있는 양후청의 ‘죽음’을 보면 8살 꼬마도 알 일이다.


양후청은 시안사변 후 장제스의 핍박을 받아 서북군에 대한 통솔력을 잃고 곧바로 유럽으로 출국 당했다. 일제가 칠칠사변(1937.7.7 베이징 루거우챠오 사건)을 일으키자 ‘귀국 후 항전’하겠다는 뜻이 장제스에게 거절 당했다. 1년 만에 몰래 귀국해 홍콩을 거쳐 난창에 머물다가 체포 당한 후 연금됐다. 장쉐량처럼 여러 곳은 전전긍긍하며 옮겨 다니며 연금생활을 하던 중, 충칭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철수하기 직전 1949년 9월 6일 장제스의 살해 지시로 특무대장 마오런펑毛人凤이 보낸 사자에게 살해 당했다. 


장제스, 마오런펑, 양진싱


장제스의 ‘개’이자 악질적인 4대 특무(리스췐李士群, 쉬언쩡徐恩曾, 다이리戴笠)중 한 명인 마오런펑은 국민당의 무시무시했던 ‘조사통계국’의 특무 4명을 보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 충칭에 연금 중이던 양후청을 비롯 그의 아들(스무살)과 9살에 불과한 막내 딸, 그의 비서 쑹치윈宋绮云 부부와 그들의 9살날 아들 쑹전중宋振中까지 모두 8명이 서슬 퍼런 비수에 의해 난도질 당했다. 특히, 특무 양진싱杨进兴은 부모가 살해 당하자 울며 소리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쑹전중의 가슴을 정면으로 찌르고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쑹전중은 태어난지 8개월만에 체포된 엄마와 함께 감옥에서 생활해 머리는 크고 몸은 갸날픈 아이였다. 6살이 되자 학교에 보내달라는 요청에 국민당 정부는 자신들의 비리가 드러날까 염려해 정치범으로 수감 중이던 동북의용군 공산당 출신 황센셩黄显声 장군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기억력이 뛰어나고 영리해 국민당의 만행과 공산당의 영웅적 투쟁에 대해 이해가 깊었다. 특무들이 어린 그에게는 감시가 소홀해 감옥에서의 소식 전파를 담당하기도 했다. 


양후청을 비롯해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칼에 찔려 살해된 후 양진싱이 다가오자 '나는 죄가 없어요. 나갈테야'고 소리쳤으나 가슴에 수차례의 칼을 맞고 요절하고야 말았다. 양진싱은 얼마 후 그의 감옥 스승 황센셩도 살해했다. 해방 후 중화인민정부는 쑹전중을 부모와 함께 혁명열사로 추인했으니 가장 나이 어린 열사인 셈이다. 시안사변의 영웅 양후청은 2009년에 신중국 성립에 특별공헌한 영웅 100인에 선정됐다. 


양진싱은 신중국 후 쓰촨으로 도피해 심지어 생산대대의 조장으로 근무하는 등 신분을 은닉하다가 공안당국에 체포돼 1958년 5월 16일 사형을 당했다. 마오런펑은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초대 대만 중화민국 국방부 정보국 국장을 역임하다가 1956년 12월 11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특무였고 장제스였다. 그런 그가 장쉐량을 살려두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중국 반란의 역사에 ‘두령은 능지처참으로 다스린다.’는 건 성문법이자 불문율이다. 장제스가 자신의 유언으로 장쉐량의 해금을 ‘윤허’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장쉐량이 기획한 ‘드라마틱’한 시안사변이 ‘세계적인 뉴스’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죽일 수도 없고 죽이자니 ‘스타’ 살해자의 오명을 쓸 것이고 살려두자니 해금할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장제스가 죽고, 그의 아들 장징궈도 죽고, 1990년 해금됐다. 세계 최장수 연금자 장쉐량은 시안사변이 일어난 지 75년 후 2001년 10월 14일, 하와이에서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니 천수를 누렸다.


양후청, 쑹치윈 일가족, 쑹전중 열사 조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