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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아웃사이드-4] 무형문화재 바이다청 선생 자택을 찾아서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두 눈 번쩍 뜰 민간예술을 봤다. 베이징TV가 올림픽을 맞아 베이징 고유의 민속, 공예, 기예 등 서민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판중시(盘中戏)라 부르는 '쟁반 위의 공연'을 쭝런(鬃人)이라 부른다. 중(宗)자가 아래에 붙은 복잡한 이 글자도 궁금했지만 쟁반을 두드리면 춤 추는 듯 인형들이 빙빙 돌아다니는 것이 신기했다.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6개월 홀로 여행하면서 중국 인터넷 뒤지는 것에 이골이 났는데도 기사는 많아도 도대체 찾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장소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해결하느라 찾고 또 찾았다. 3년 전 모 신문사 기자가 쓴 기사 중에 5년 전에 이 쭝런 보유자가 스차하이(什刹海) 근처의 둥관팡(东官坊)후퉁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을 겨우 찾았다.


8월 15일 오후 5시가 넘었다. 골목을 찾아 돌고 돌아 둥관팡1호 앞에 도착했다. 아직도 여기에 살지도 모를 일이다. 채소가게 아주머니에게 ‘바이다청(白大成) 선생이 사는 집이 저기 맞아요?’ ‘잘 찾아왔네. 방금 귀가하던데’ 옆에 있던 아저씨는 ‘문 옆 초인종 누르면 된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렸으니 그냥 들어오라고 한다. ‘한국에서 차이팡(采访, 인터뷰)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니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물 한잔 하겠냐며 느릿하면서도 인자한 할아버지 바이다청 선생. '공예대사(工艺大师)'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대가의 인상 그 자체다.

어떤 내용을 인터뷰하러 왔는가 물었는데 나름대로 자료를 찾고 공부도 열심히 했건만 막상 '질문'에 난감했다. 노련한 인터뷰어는 아니어도 거리에서 중국사람들과 대뜸 묻고 또 되받고 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니 약간 긴장도 됐나 보다.




‘쭝런의 복장은 대부분 경극의 그것과 비슷하지’라고 먼저 말문을 여는 자세가 이미 여러 매체와 접해 본 솜씨다. 그렇다. 쭝런은 점토(胶泥)로 머리와 받침대를 만들고 수숫대나 참깨대로 몸통을 만든 후 색종이나 비단으로 옷을 입혀 만든다고 한다. 이 옷은 다 경극의 주인공을 그대로 옮겨온 것.

바이선생의 거실이며 작업실은 자그마한 경극박물관을 방불하듯 온 사방에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백사전’과 같은 경극 레퍼토리로 가득하다. 류페이(刘备), 관위(关羽), 장페이(张飞)는 금방 알아봤는데 그 사이에 연한 분홍색 옷을 입고 선 장수가 낯설다. ‘뤼부’라고 한다. 중국말로 하니 알기 어려웠는데 생각해보니 여포(吕布)였다. 그래서 ‘차오차오(曹操)도 있는지요’ 물으니 위쪽 구석에 있다고 한다. 정말 삼국지 등 중국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진열이다.


서유기의 쑨우쿵(孫悟空)을 쟁반 위에 올렸다. 댕댕댕댕 나무작대기로 쟁반을 두드리니 빙빙 도는 것이 마치 경극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듯하다. 두드리는 소리는 경극에서 전통악기로 반주하는 소리와 같은 리듬이라고 덧붙여 설명해준다.

가운데 ‘중’자의 가운데 ‘뚫은 곤’이 아래로 유난히 길게 뻗은 붓글씨 ‘반중희(盤中戱)’가 마주 보이는 가운데 이 보기 드문 독특한 민간예술 앞에서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나무작대기를 들고 두드려봤다. 정말 신기하게도 몸을 곧추세운 채 쑨우쿵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참 말을 잘 듣는다.

이 쭝런은 언제부터 민간에서 생겨난 것일까. 바이선생은 ‘청나라 말기’ 즈음이라고 한다. 청나라 말기는 서민들의 민간예술이 대중화되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극이 건륭(乾隆)제 시대 생겼는데 왜 청말이냐'고 묻자, 건륭제 때에 처음 역사에 나타나긴 했지만 가경(嘉庆)제를 거쳐 도광(道光)제 시대에 이르러 비로서 본격적인 경극이 나타났다고 한다.


도광제가 1850년에 승하했고 경극이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생겨났기에 쭝런의 경우 약 백여 년 전부터 민간예술로 자리잡은 것이다. 바이선생은 1939년 생으로 만주족이다. 중국 민간예술은 주로 가전되는데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젊은 시절 병을 앓게 되면서 자신의 취미인 그림과 서예를 즐기다가 배우게 된 것이다.

50여 년 전 스승이 만들었던 쭝런을 꺼낸다. 종이로 만든 자그마한 쭝런이다. 1915년에는 파나마국제박람회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데 바이선생은 쭝런을 전수 받은 후 보다 튼튼하고 활동적인 쭝런을 만들기 위해 경극과 피잉시의 장점들을 모티브로 지금의 쭝런을 창조했다. 그래서 민간 회화와 다양한 중국 옛 이야기들이 창조적으로 묻어있는 독창적인 민간예술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바이선생에게는 ‘진정한 제자’가 없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 동안 수많은 기자들이 똑 같은 질문을 했는데 방대한 중국문화를 이해하면서 고단한 이 일을 하려는 의지가 필요한데 요사이 그런 젊은이가 없다며 안타깝다고 한다. 한 인터넷사이트와 매체가 몇 년 전 쭝런 시연 및 강연행사를 주관했는데 수만 명이 모여 열광하고 흥미를 지니긴 했지만 이를 배우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이징쭝런(北京鬃人)은 2007년 6월, 베이징 시의 무형(非物质)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 바이선생만이 유일한 쭝런 예술 보유자이다. 거실 안쪽의 작은 방 벽에 베이징인민정부가 공포한 팻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할머니와 손자가 들어왔다. 뒤를 따라 강아지도 따라 들어왔는데 낯선 사람이 왔다고 손자는 울고 강아지는 바이선생 발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질문과 답변을 따라 고개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표정이 귀엽다.

쭝런은 다른 민간예술가와 달리 외부에 작업실이나 예술품을 파는 가게가 없다고 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생계를 위해 문화거리마다 가게를 두는데 비해 특별한 주문이 있을 경우를 빼고는 상품처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예술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가고 있는 대가의 면모가 아닐까.


그럼 외부에 많이 알리기도 하는가 묻자 올림픽 개막식 당일 낮에 프레스센터(新闻中心)에서 행사를 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많은 기자들이 집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 한국 방송국에서도 취재했다고 하고,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주도해서 ‘내일 이 시간 즈음에 10여명의 외국기자들이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경극 인물들 사이로 올림픽 마스코트인 푸와(福娃)들은 무엇인가. 중국 매체가 기획해 만들었는데 2마리는 매체가 사용하는 듯하며 3마리만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들의 판중시는 어떨지 궁금했다. ‘이 푸와 공연이 보고 싶은데요?’ ‘당란커이(当然可以)’

올림픽 푸와 쭝런이 뱅그르르 돌고 고개도 살랑살랑 흔들며 펼치는 댕댕댕댕 공연은 앙증맞고 단조롭다. 이 단순해 보이는 율동이야말로 치열하게 예술혼을 담아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달콤한 중국 민간예술을 맛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1시간 30여분 동안 칠순의 예술가와 독대를 하면서 우리네 할아버지로부터 옛 이야기를 듣는 듯 포근했다. 끈기와 사랑으로 일궈낸 전통의 멋을 풀어내는 학자의 강연을 듣는 마음이 이와도 같으리라.

이야기 중에 끊임없이 질문을 받았다. 중국어 어디서 배웠는지, 올림픽 경기장은 왜 가지 않고 여길 왔는지.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해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 나는 할아버지를 한번도 뵌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라오베이징(老北京) 분위기 물씬 풍기는 골목 끝 집에서 배운 바이다청 선생의 마음 씀씀이가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유일무이하거나 독보적이면 성을 붙여 부르길 좋아하는 중국에서 ‘쭝런바이(鬃人白)’ 야말로 고수의 기운이 풍긴다.

문밖까지 배웅하며 그윽한 눈매로 내 손을 잡아주는 마음을 어찌 베이징에서 느끼리라 생각했으랴. 어디에 묵느냐 묻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길까지 살며시 머리 속에 그려주는 배려는 무턱대고 찾아간 이방인에게는 그저 감사한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할까. 바이선생이 들어간 후 문 앞에서 진정한 대가의 멋을 생각하느라 한참을 벗어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