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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푸청먼'(阜成門) 지하철에서 동쪽, 유명 상업지구인 '시단'(西单) 북쪽에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제왕들의 위패가 모셔 있는 <역대제왕묘>(历代帝王庙)가 있다명초의 수도였던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후 기존 사찰을 활용해 꾸몄다 한다


중국정부는 역사적 유물을 등급을 나누어 보존, 관리하는데  <역대제왕묘> 4급에 분류되니, 그 중요도가 그리 높지는 않아보인다입장료도 20위엔으로 아주 싼 편이 아니지만 역대 제왕의 역사를 공부하는 셈치고 찾아 갔다.



주전(主殿) '경덕숭승전'(景德崇聖殿)이다이곳에는 21명의 황제와 167명의 공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한다명나라를 이어받은 청나라 역시 이곳에 위패를 모셨다 하니 그 전통을 잘 이어왔나 보다.



'경덕숭승전' 실내이다들어가면 정면에 '흡연금지' 외에도 '촬영금지' 표시가 있다.


일단 눈치 좀 보다가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관리인이 사진 찍으면 안된다고 그런다사진이란 혼자만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도 같이 볼 수 있는 간접경험의 도구이자 이곳을 더 잘 알릴 수 있는 홍보수단인 것을 모른다는 어투다.


아마도, 위패가 모셔져 있으니, 경건해 달라는 의미인 듯 한데 ,청조 황제들의 업적만큼 나 역시 존경심이 있어 경건한 마음을 담아 찍었으니 그들도 '저 세상'에서 용서했으리라.


보통 외국인 티를 내면서 '못 알아듣는 듯' 계속 사진을 찍으면 그냥 허용하는 걸 보면 반드시 '촬영금지'를 할 이유가 철칙은 아닌게 대부분 중국 관광지이긴 하다그런데, 여긴 좀 심하다. 아주 막무가내이다.



역대 제왕묘비 중 하나인데 비명 내용이야 깨알 글씨라 모르겠으나 비석의 양각이나 벽, 지붕 문양들이 꽤 '황제' 모시는 형상이다.



<역대제왕묘> 한쪽 건물에 '역대제왕묘역사연혁전'이 상설 전시 중이다입장료 파는 곳, 입구에 대형현수막도 걸려 있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는 작은 규모다다만, 삼황오제(三皇五帝) 이래 역대 황제들과 그 공신들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고 시대별로 차곡차곡 따라가면서 이해가 쉽게 잘 만들어져 있다.


특히,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 기존 ''()들과 차별화된 지위를 선포하기 위해 이름 지은 '황제'를 차용한 삼황오제의 기록부터 시작되니중국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좋은 교과서이다중국인들의 역사 서술은 대중들을 향해 다소 과장이 많으니 새겨, 익힐 일이다.



촬영 문제는 여기서도 발생했다중국의 대부분의 박물관은 후레쉬만 번쩍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데 이곳만 유독!!

 

개인적으로 청나라 초기의 강희’ ‘옹정’ ‘건륭황제에 관심이 많아 흥미진진하게 읽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찍지 말란다. 정말 ~*_)

 

그렇다고 역사공부를 그만 둘 수 없으니, 청나라 역대 황제들에 대해 알아보자.


 


'청'(淸)은 소수민족이던 동북의 만주족이 한족 정부인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다.


'청태조'로 대접 받는 '누루하치' 1616년 만주 지방을 통일한 후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뛰어난 군사조직인 '팔기제도'를 통해 성장했다1626년에 병사한 '누루하치'의 뒤를 이은 여덟째 왕자 '황태극'은 1636년 국호를 ''으로 바꾸고 명나라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치렀으니 그를 '청태종'이라 한다.


 


'청태종'이 후계를 정하지 못했기에 '제왕회의'에서 아홉째 아들인 '복림'이 추대되었다섯살에 불과했기에 최대 권력자이던 '도르곤' 섭정하고 연호를 따서 '순치제'라 한다1644년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한 것은 '도르곤'의 권력 하에서 이뤄진 것이며 그의 사후, 비로서 친정하고 명나라 잔존세력을 평정하게 된다.


'순치제'의 유지를 받들어 1661, 셋째아들이며 여덟살이던 '현엽'이 즉위했는데 6년의 섭정을 거쳐 친정한 후, 재위기간이 무려 61년이나 되는데, 그가 바로 '강희황제'이다.


'강희황제'는 바야흐로 중앙집권적인 통일정부를 구축하고 실질적인 지배를 이뤘을 뿐아니라 주변 국가와의 전쟁을 통해 러시아, 외몽골, 대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영토확장을 도모했다.


중국에서는 아주 드라마틱한 인물로 평가되어, 소설과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기도 하다.


 


'강희황제' 역시 후계문제를 확정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넷째아들이던 '윤진'은 치열한 붕당싸움을 통해 황위에 오르니, 그가 '옹정황제'이다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기존의 중앙조직인 6부 대신에 황제 친위조직을 통해 통치하게 됐다.


'옹정황제' 역시 좋은 소재의 드라마여서, 한국에서 방영되기도 했다'옹정황제'는 지혜로운 후계 제도를 통해 넷째아들이던 '홍력'을 자신의 사망과 동시에 황위에 오르도록 조처했으니, 1735년 무난하게 즉위한 그가 바로 '건륭황제'이다.


'강희' 이래 부유한 재정을 기반으로 문화적으로도 풍성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밖으로는 주변국가에 대한 평정에 직접 나섰고, 외교적으로도 유럽과 소통하기도 했다청조의 '강희' '옹정' '건륭' 시대의 비사에 대해 중국사람들은 매우 흥미 있어 한다특히, '얼위에허'(二月河, 필명)라는 작가가 쓴 3부작 대하소설은 수천만부나 팔린 베스트셀러다.


한국에서도 번역돼 판매되고 있다.


 


1796년 '강희' 재위 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경외해 태상황제가 된 '건륭황제'의 선양으로 즉위한 열다섯째 아들인 '옹염'은 친정과 동시에 당시 권력가이던 '화신' 세력을 물리친 후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조성했다.


그러나, '백련교도의 난'에 직면했으며, 아편이 유입되는 시기이기도 했으니 바야흐로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드는 전환기의 황제였다.


'가경제'의 둘째아들인 '민녕'은 1820년에 즉위했는데, '도광제'라 한다. 국가재정 및 사회문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아편'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다가 오히려, 영국과 '아편전쟁'을 치루게 되고,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으로 서구자본주의 국가에 문호를 열지 않으면 안됐다.


안으로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 노력했으나 부패와 빈익빈 부익부의 고리는 깊어지고, 서서히 민중들의 반란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1850년 '도광제'의 넷째아들인 '혁녕'이 즉위하니 그가 '함풍제'이다.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해 민심의 이반이 최고조로 달했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과의 '천진조약'의 체결과 비준 분쟁의 와중에 병사했다.


이때 황제 즉위를 다투던 '공친왕'이 그를 대신해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외국의 공사들이 수도에 상주를 허용하는 등 합리적으로 대외 개방정책을 펼쳤으며외국과의 교섭업무를 총괄하는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해 운영했다.


1861년 '함풍제'와 서태후 사이의 외동아들인 '재순'이 다섯살에 즉위했으니 '동치제'라 한다. 즉위 초기에는 동태후(자안황후)와 서태후(자희황후)의 공동 섭정을 거쳤고 형식적인 친정체제에 이르러 서태후의 실권 아래 놓였다가 열여덟살에 병으로 사망한다.


내란이 종식되고 '공친왕'과 한족 중심으로 문호의 개방과 자강정책을 펼치니 일시적인 중흥의 시기가 도래했고 이를 '동치중흥'이라 한다.


 


1874년, 실권자이던 서태후는 '도광제'의 일곱째아들인 '혁현'의 아들이며 여동생의 아들, 조카이기도 한 '재첨'을 황제로 즉위시키니 그가 '광서제'이다.


서태후의 전횡과 청불전쟁,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점차 피폐해 가자 '캉유웨이' 등 변법자강파와 손잡고 1898년 개혁정책인 '무술변법'을 통해 '입헌군주제' 기반으로 서민생활을 돌보는 등 개혁을 추진한 자애로운 황제였다. 그러나, 서태후의 쿠데타로 실패한 후 유폐됐다가, 1900년 '의화단사건'이 발발하자 서구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하니, 서태후와 함께 '서안'으로 피신했고 회경(回京) 이후, 유폐생활 도중 사망한 비극적 운명의 불운한 황제였다.


1908년,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아들인 '부의'는 불과 세살때 청조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선통제'이다.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인 '신해혁명'으로 퇴위했고 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왕으로도 '노릇'했다. 이후 소련에 억류됐다가 중국공산당정부에 소환돼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여생을 보내다가 1967년 사망했으며 그가 생전에 쓴 책은 <마지막황제>로 영화화되었다.

 


황제의 위패가 있는 <역대제왕묘>에서 청나라 열두황제와 함께 중국역사를 뒤돌아보니 파란만장이 따로 없다.


파란 하늘을 따라 기나긴 200여년 청나라의 흥망성쇠가 훌쩍 지나는 듯하다. 위패란 어찌 보면 한갖 나무에 불과하겠지만 역대 황제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정치권력의 향배와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슬픔과 기쁨으로 얼룩진 일반 민초들의 생활과 문화를 같이 살펴보는 것 또한 북경에서 즐기는 중국문화체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독 하늘이 파랗다. 구름도 솟고 나무도 흔들리건만 역대 황제의 그림자는 건물 속에 묻혀 조용하기만 하다. 역사책을 뒤져 파헤치지 않으면, 중국에 대한 우리의 역사인식도 멈추고 말 것이다.



'동북공정'은 중국동북의 역사를 탐하는 일이다. '사실'을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욕구를 드러냄이지 않겠는가. 사진 속, 약간은 기울어진 <역대제왕묘>에는 중국정부의 역사인식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담겼을 지 모른다.


'사실'은 당연히 고증할 일이건만, 한국과 중국의 역사인식과 '권력'의 지향은 다르니 그래서, 참 어렵고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이자 한탄이다. '역사'는 지적 재산이다. 배우고 또 익히고 나눌 일이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되면 <역사제왕묘>를 찾아, 배우고 또 서로 나누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