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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85] 창저우 옌청과 비지샹

9월 28일 저녁 창저우(常州) 시내에서 중국 아가씨 마리(马莉)를 만났다. 지난 7월 27일 꾸이양(贵阳) 폭포 앞에서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고 사진을 주느라 메신저를 주고 받았더니 꼭 창저우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었다. 원래 일정에는 없던 곳이지만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곳이 있어서 꼭 오고 싶기도 했다.


마리는 창저우 시내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초등학교 선생이다. 약속 시간에 맞춰 나왔는데 처음에는 두 달 전 모습이 기억나지 않아 언뜻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당시는 여행 중이라 간편복장이었는데 지금은 업무복장이니 말이다. 하여간, 반갑게 맞아주고 함께 저녁도 먹고 맥주도 한 잔 했다. 그리고 내일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저녁을 먹자고 약속까지 했다.


9월 29일 오전 시내에서 남쪽으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옌청(淹城)에 도착했다. 창저우에 구이 온 이유는 바로 이곳을 보기 위해서였다.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삼청삼하(三城三河), 즉 둥글게 흘러가는 3개의 강이 각각 3곳의 성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명청 시대를 알려면 베이징을 봐야 하고, 수당 시대를 알려면 시안을 봐야 하고, 남송 시대를 알려면 항저우를 봐야 하고, 춘추 시대를 알려면 옌청을 봐야 한다.(明清康北京 隋唐看西安 南宋看杭州 春秋看淹城)’는 곳이다.


티켓을 팔지 않는다. 알고 봤더니 며칠 후 새로이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개장할 때까지 무료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곳곳은 아직 공사가 한창인 듯 보였다. ‘중국춘추옌청(中国春秋淹城)’ 현판이 걸린 회색 성곽이 나타났다. 그리고 좌우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곳곳에 멋진 다리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서 있는 곳 다리의 이름을 보니 옌쥔챠오(淹君桥)이다.


  
창저우 우진 현에 있는 3개성과 3개 하천으로 이뤄진 유래가 없는 수성인 옌청 입구
ⓒ 최종명
창저우


2500여 년 전 춘추시대에 엄군(淹君)이 쌓은 이 수성(水城) 왕국에는 하나의 전설이 이어오고 있다. 국왕인 엄군에게는 백령(白灵)이라는 아리따운 공주가 있었는데 서예와 무용도 잘하고 용모도 예뻐 모든 사람들이 사랑했다고 한다. 당시 산둥취푸(山东曲阜)에 거점을 둔 엄(奄)나라의 군주였는데 주(周)나라에 멸망 당해 쫓기어 남쪽으로 이주했다.


오(吴)와 월(越)이 쟁패를 겨루던 강남, 또다시 오나라에 쫓겨 이곳까지 이주한 후 외세 침략에 대비해 이 난공불락의 수성을 쌓았으며 연못을 만들어 백옥귀(白玉龟)를 키웠다. 신령한 이 거북이는 매일 옥단(玉蛋)을 낳았으니 호국의 보물로 간주됐다.


어느 날 공주는 성밖에 쓰러져 누워있는 잘 생긴 남자를 발견하게 됐다. 그는 은밀히 잠입을 시도한 주변 국가의 왕자였는데 미사여구로 공주는 물론 엄군에게 신임을 받았다. 심지어 엄군은 공주와 결혼시켜 부마로 삼으려 했다.


엄군이 외출한 틈을 타 왕자는 공주의 명의를 도용해 백옥귀를 훔친다. 엄군이 돌아와 백옥귀가 사라진 것을 알고 벌컥 노해 그만 공주에게 화풀이를 해 죽여버린다. 그리고 머리와 몸통, 다리로 세 토막을 내어 각각 지금의 머리돈대(头墩), 몸통돈대(肚墩), 다리돈대(脚墩)에 나누어 묻어버렸다.


  
창저우 옌청에 있는 옌쥔챠오 다리. 2500여 년 전 이 수성을 만든 엄족의 지도자 이름을 땄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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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백옥귀를 오나라 왕에게 보내고 군대를 빌어 화공으로 옌청을 무너트리고 엄군을 죽이고 엄족(奄族)을 멸망시키게 된다. 이 엄족은 ‘대(大)’와 ‘귀(龟)’를 합쳐 만든 글자로 귀족(龟族)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렇게 멸망 당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성 안으로 들어서니 큰 길 옆으로 문화거리가 조성돼 있다. 아직은 번성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곳이 다 완비되면 꽤 북적거릴 만큼 민가와 식당 등 거리 모습을 잘 정리해 뒀다. 길 한가운데는 명나라 시대의 진품 석각 수호신이 서 있다. 정말 오래된 진품처럼 많이 낡았지만 긴 칼을 앞에 차고 서 있는 모습이다.


이 거리를 지나니 돌로 만들어진 멋진 3개의 패방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오른쪽에 흐르는 하천과 왼편 푸른 수풀 사이로 웅장하고 품격 있게 서 있는 패방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제일 앞에 서 있는 것은 충의방(忠义坊)이라 부른다. 온갖 현란한 조각 기술로 동물과 사람, 강산과 나무를 새겨놓은 패방에는 하악일성(河岳日星)이라 쓰여있는데 ‘아래에는 강과 산이고 위세는 해와 별(下则为河岳,上则为日星)’ 말에서 따온 듯하다. 아래 부분에는 차지위대장부(此之谓大丈夫)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이 말은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로 ‘부귀에도 현혹되지 않고, 가난해도 지조를 잃지 않고,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아야(富贵不能淫,贫贱不能移,威武不能屈)’ 바로 대장부이라는 뜻이니 정말 충의를 기린다 하겠다.


이 패방은 아마도 청나라 중기시대 제작된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패방을 입수해 설치한 옌청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문화혁명 당시 철거돼 훼손된 것이었다 한다. 높이는 7미터이고 너비는 6.1미터인 이 패방은 네 기둥과 3층으로 만들어졌으며 온갖 그림 중 죽림칠현의 형상과 함께 사자와 봉황 등이 음각된 것으로 봐서 화산(华山)의 관제묘(关帝庙)에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창저우 옌청에 있는 충의패방, 화산 부근에 있던 관우 사당에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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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패방에는 일편빙심(一片冰心)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나라 시대 시인인 왕창령(王昌龄)의 7언 절구 중에 나오는 ‘일편빙심재옥병(一片冰心在玉壶)’에서 따온 말인데 옥으로 만든 술병에 담긴 변하지 않는 순결하고 청렴한 마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충의방에 비해 문양들도 많지 않고 훨씬 담백하고 깔끔한 모양이다.


청나라 함풍제 시대에 만들어진 또 하나의 패방을 지나니 막 카이청(开城) 의식이 끝난 행사장이 보였다. 미처 확인을 못하고 왔으니 행사를 못 본 것이 아쉽다. 꽃가루가 행사장 곳곳에 뿌려져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전체적으로 옌청의 공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 그런지 어수선하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니 배 한 척이 보이고 그 위에 와이(Y)자 형으로 만든 받침대 위에 북 하나가 보인다. 그 뒤로 새빨간 색으로 화려하고 선명한 ‘淹城’ 두 글자가 무대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 듣자 하니 며칠 후 국경절에는 이곳에서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것을 위해 서둘러 이 행사를 벌인 듯하다.


  
창저우 옌청의 광장. 무대가 있고 배와 북이 있고 관중석 의자들이 놓여있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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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가로질러 가니 조그만 광장에 춘추전국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재미난 조각들이 많이 전시돼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관심은 물고기가 숨어버릴 정도로 예쁘다 해 첨어(沉鱼)라는 별명까지 얻은 서시이다. 서시가 실을 팔에 걸고 있는 모습이라 해 서시만사(西施挽纱)라 이름이 붙었다. 정말 4대 미인들이 당시 얼마나 예뻤는지 알 길이 없지만 현대사람들의 손재주로 탄생되는 모습은 정말 감탄이다.


기러기가 내려 앉았다는(落雁) 왕소군과 함께 서시는 아름다운 미인을 일컫는 첨어낙안(沉鱼落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달도 숨어버린(闭月) 초선, 꽃조차 부끄러워한(羞花) 양옥환도 빠질 수 없으니 폐월수화(闭月羞花) 역시 동의어이다. 이렇듯 수 천년 역사에서 뽑은 미인이니 참 비유도 많은가 보다. 서시만사와 함께 소군출새(昭君出塞), 초선배월(貂禅拜月), 귀비취주(贵妃醉酒)도 다 미인의 자태에 빗대어 당시의 역사를 담으려는 사람들의 풍류에 다름 아닐 듯하다.


  
창저우 옌청 광장에 있는 중국 4대 미인인 서시의 조각상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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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는 실을 팔에 걸치고 씻으러 강가에 나왔는데 잔잔한 수면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도 잊고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한다.


왕소군은 한나라가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멀리 변방으로 보내졌는데 가는 도중에 슬픈 마음을 달래러 악기를 뜯고 있는 소리를 듣던 기러기가 날갯짓을 하는 것도 잊고 땅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정말 물고기와 기러기가 들으면 가라앉고 내려올 정도로 기가 막힌 비유가 아닌가.


삼국시대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하는 연환계의 주인공이며 왕윤의 가기(王允的歌妓) 초선은 어느 날 달에 예를 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구름이 밝은 달을 가리게 됐다. 이를 보고 초선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할까 싶어 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고 표현하게 된다.


당나라 양귀비는 궁에 들어온 후 화원을 거닐고 있었는데 화창하게 핀 꽃들을 보며 고향생각에 한탄하며 미모사(含羞草) 꽃을 쓰다듬었다고 한다. 이에 꽃잎이 수축하고 줄기가 고개를 숙였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비유해 꽃조차 부끄러워(含羞) 한다고 했다.


서시뿐 아니라 춘추전국 시대의 고사와 관련된 동상들을 좌우로 세웠다. 역사 공부를 하기에 좋은 것들인데 어렵고 처음 듣는 이야기도 많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은 <여씨춘추(吕氏春秋)> ‘전국 여불위(战国 吕不韦)’ 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방울을 훔치기 위해 자기의 귀를 막으면 방울소리가 남들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엄이도령(掩耳盗铃)과 함께 <사기(史记)> ‘염파인상여열전(廉颇蔺相如列传)’에 나오는 부형청죄(负荆请罪) 고사도 있다.


조나라 사람인 인상여는 원래 진나라가 요구한 보석을 온전하게 되돌려 가지고 왔다는 ‘완벽(完壁)’의 고사로 공을 세워 높은 직위에 올랐다. 염파 역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이긴 했지만 인상여보다는 낮아 이에 섭섭해 하면서 인상여를 만나면 한번 그를 치욕스럽게 하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이를 분명히 들은 인상여였지만 염파를 만나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 그가 염파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창저우 옌청으로 들어가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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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람들이 묻자 인상여는 지금 진나라와 조나라가 다투고 있는데 우리 둘이 서로 싸우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묻고 둘이 서로 힘을 모으면 진나라도 조나라를 업신여기고 쳐들어오기 힘들 것이라 하며 국사를 위해 사적인 은원은 버렸다고 했다.


이를 전해들은 염파는 크게 뉘우치고 형장(荆杖)을 짊어지고 인상여 집을 찾아와 죄를 청했다고 한다. 정말 고사에서 배우는 인생 이야기가 재미있지 않은가.


광장에는 아직 어수선하다. 이곳 옌청은 대규모 공사를 거쳐 거듭나려는 것인가 보다. 곳곳에 수리도 하고 새로운 건축물을 세우고 거리도 멋지게 꾸미고 있다. 광장을 지나니 진한 갈색 빛이 도는 나무로 축조한 다리가 나왔다. 이 다리를 지나려면 입장권을 사야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는 옌청 외곽을 광장과 풍물거리로 만들어둔 시설들이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그 옛날 그대로의 옌청으로 차례로 들어가는 것이다. 외청(外城)을 둘러싼 하천을 지나 다시 수풀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가니 다시 내청(内城)을 둘러싼 하천이 나왔다.


다시 좁은 다리를 건너 들어가니 가장 안쪽 성인 자성(子城)을 둘러싸고 있는 하천에는 곳곳에 잔뜩 수련이 뿌리박고 있다. 아직 공사 중인 다리가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건넜는데 자성 안에 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마당을 가꾸고 있다. 그 앞에 있는 건물이 엄군전(淹君殿)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창저우 옌청의 가장 안쪽 자성에 있는 엄군전, 공사중이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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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 나와 하천을 한 바퀴 돌 생각이었는데 한쪽 귀퉁이를 막아놨다. 정말 옌청의 핵심에는 들어가보지 못한 것이다. 며칠 후 본격 개장한다는 것인데 다음에 다시 꼭 찾아보고 싶은 그런 곳이다. 후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안내판에 2003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독특한 구조의 성곽이 그토록 오랜 세월 자취를 유지하고 있다니 아마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될 날도 머지 않은 듯하다.


옌청이 있는 창저우 우진(武进) 현에 마리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다. 원래는 옌청을 본 후 초등학교를 방문하기로 했었다. 자기 반에 아주 가난하지만 총명한 아이들이 많다고 해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었지만 국경절 연휴로 인해 수업을 한다니 기대가 컸는데 교장선생님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연락이 왔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숙소에서 휴식했다. 날씨가 가히 한여름처럼 더웠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마리는 학교 동료랑 함께 왔다. 샤브샤브인 훠궈(火锅)요리를 함께 먹으며 학교 선생님 생활이야기도 하고 중국 여행에 관해서도 이것저것 말을 주고받으니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함께 온 남자 선생님이 다음날 대학교에서 주제발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다시 다음날 저녁 정식으로 학교로 초청할 테니 술을 진하게 마시자는데 그만 허락하고 말았다. 일정을 하루 더 연장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창저우 비지샹 마을의 부두에 적힌 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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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마리에게 시내에서 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니 비지샹(篦箕巷)을 알려줬다. 숙소에서 걸어서 20여 분 걸으니 옛날 운하 북단에 위치한 조그마한 골목길을 찾았다.


수나라 시대 운하를 만든 것은 익히 아는 바였는데 이곳에 그 당시 만들어진 운하가 있을 줄은 몰랐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폭이 100여 미터 너비는 돼 보이는 운하에 짐을 실은 배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부두인 마터우(码头) 터가 있는데 지금은 유명무실하다. 운하를 끼고 있는 이 골목의 이름이 바로 머리 빗 이름을 딴 것이니 몇 군데 가게마다 다 빗을 팔고 있는 곳이다.


담벼락에 창저우의 옛 지명을 딴 옌링슈비(延陵梳篦)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소(梳)’는 얼레빗이고 ‘비(篦)’는 참빗이다.


이 빗은 이미 16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곳에서 만들어진 빗들이 운하를 타고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지금은 민간 전통 공예로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생활필수품일 뿐 아니라 여인들이 마음을 달래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얼레빗은 우각(牛角)과 양각(羊角)이나 대추나무(枣木), 배나무(梨木) 등도 있지만 주로 황양목(黄杨)을 재료로 쓰고 참빗은 대나무 죽순(毛竹)으로 만든다고 한다.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 4대 미인의 자태 그대로 허리 동선에 맞춰 만든 빗이었다. 옌청에서 서시 동상을 보면서 중국 역사 속의 미인들을 살펴봤는데 다시 이곳에서 빗이 된 미인들을 보니 재미있다. 미인의 허리로 머리카락을 빗는구나 상상하니 웃음도 나왔다.


  
창저우 시내 운하 옆 비지샹에 있는 지역특산이면서 전통공예품인 빗, 4대 미인의 동선을 따라 머리를 빗는 것인가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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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 들어서니 온통 과거 역사의 유명인물들은 다 총출동한 듯하다. 빗의 디자인이 대부분 낯익었기 때문이다. 4대 미인들이 많은 편이고 <서유기>나 <홍루몽>의 주인공들도 한 세트로 팔고 있다. 춤추는 무희들도 정말 예쁘고 경극(京剧)에 나오는 분장(脸谱)도 소재가 된다. 길상(吉祥)을 뜻하는 용과 봉황도 있으며 학과 뱀, 물고기도 다 절묘하게 빗의 굴곡을 따라 잘 어울리고 있다. 나비의 날개로 만든 양 갈래 빗도 참 기발하다.


가게에 들어서니 예쁜 빗들이 많다. 참 이상한 것은 다른 관광지에서 이와 비슷한 빗들을 간혹 보긴 했는데 그다지 손길이 가지 않았었다. 하여간 여자들이라면 기념으로 꼭 사지 않을까 싶다. 비싸지도 않다. 4대 미인 빗 4개 한 세트는 여러 종류이지만 50위엔에서 100위엔(약 1만3천원)이면 아주 그럴 듯하게 선물해도 좋을 정도다.


이곳은 청나라 건륭제가 순행 중에 평복을 하고 들렀을 정도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그저 평범한 골목길이며 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고 그저 나 같은 이방인이나 그 옛 향수를 더듬을 정도인 가 보다.


운하를 따라 배들이 빈번하게 다닌다. 배 갑판 위에 선 젊은 청년이 손을 흔든다. 자기를 찍는 줄 안 것일까. 웃통을 벗고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듯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다. 배가 떠나가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왼편은 긴 성벽이 이어져 있다. 성벽 옆에 문이 있는데 이 부근에 옛날에는 역참(驿站)이 있었다고도 한다.


  
창저우 시내의 옛날 운하, 지금도 짐을 실은 배들이 지나다닌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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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리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온 식구들이 국경절이어서 함께 모이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또 바람을 맞았다. 뭐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면 늘 있는 다반사이니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쉽기는 하다. 굳이 하루 더 묵고 기다렸는데 말이다. 기분이 좋을 리 없고 날씨도 꽤 덥다.


숙소를 되돌아가다가 터미널에 갔더니 인산인해다. 국경절 연휴가 시작이니 버스표 예매를 하러 왔는데 가까운 거리는 내일 출발하는 날 오라고 한다. 그래 설마 표 없어서 못 가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