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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4회 허난 2 영화배우를 꿈 꾸는 아이들이 선보인 소림무공

 

 

5)   카이펑開封 송나라 판관 포청천 호령소리가 들리는 듯

 

카이펑 시내에는 당나라 시대에 무측천에 의해 폐위됐던 예종이 다시 복위한 시점인 서기 712년에 지어진 사원인 다샹궈쓰(大相國寺)가 있다.

 

입구에 수호지에 등장하는 노지심(智深)이 큰 나무를 뽑는 조각상이 있다. 바로 이 부근 채소밭에서 노지심이 80만 금군의 교두인 임충(林沖)과 의기투합해 의형제를 맺은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톈왕뎬(天王殿)을 비롯 각 건물마다 독특한 불상들과 나한상, 불교 장식들로 넘쳐나고 있다. 특히 천수관음상 앞에는 사람들이 많다. 서민들에게 천수관음이야말로 가장 인기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많으니 피어 오르는 향 냄새로 코를 자극하고도 남는다. 노지심 앞에서 서로 사진을 찍으려고 발버둥 치기도 하고 청나라 복장을 하고 더위도 잊은 채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어른들처럼 향초를 피우며 예를 올리기도 하는 아이들 보는 것도 즐거운 눈요기라 할 수 있다.

 

역시 카이펑은 북송시대 수도였던 만큼 최고의 관청인 카이펑푸(開封府)가 있다. 동쪽은 관공서이고 서쪽은 사당의 형태로 남아 있는 거대한 관청이라 할 수 있다. 양쪽으로 긴 성벽을 따라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이 옛날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서슬 퍼런 관청의 모습이 연상된다.

 

역대 카이펑푸의 박물관이자 당시의 복장이나 거리 풍경들을 전시한 누각인 칭신러우(心樓)에 올랐다. 온 사방을 다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가 다름 없다.

 

노지심(왼쪽), 포청천의 카이펑푸(오른쪽 위), 포청천의 사당(오른쪽 아래)

 

카이펑푸의 주인공은 검은 얼굴에 검은 수염을 휘날린다 해서 바오라오헤이(包老黑)로 불렸으며 포청천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포증(包拯)이다. 그의 석상이 하나 서 있는데 늠름하고 온화한 모습이라 드라마에서 봤던 날카로운 지혜와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

 

서쪽에는 감옥이라 볼 수 있는 라오팡(牢房)이 있는데 좁은 감옥 안으로 한 번씩 눈길을 던져 바라본다. 그리 유쾌한 모습은 아니지만 지은 죄를 반성하는 곳이니 차분해질 수도 있겠다 싶다.

 

카이펑푸를 나와 20여 분 걸어가면 바오궁츠(包公祠)가 보인다. 카이펑푸가 관청이라면 바오궁츠는 포증이 살던 집을 개조한 사당이다. 포증이 바오궁츠에 거주하면서 카이펑푸에서 근무했던 것이다.

 

문과 건물, 정자와 벽, 복도와 다리, 분수와 폭포, 석상과 괴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담한 모습이다. 공사 구분에 철저했던 포청천()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의연한 자태가 떠오른다.

 

6)   덩펑登封 영화배우를 꿈 꾸며 무공을 선보이는 아이들

 

허난 성 정저우(鄭州)에서 1시간 가량 서남쪽으로 달리면 덩펑(登封) 현이다. 소림사 초입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다시 10km를 가면 바로 쑹산(嵩山) 소림사다.

 

소림사까지 오르는 길에는 소림무술을 연마하는 학생들 모습이 장관이다. 이것도 일종의 관광상품처럼 보인다. 10살 전후의 아이들 수십 명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받으며 뜨거운 햇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것이 애처롭기도 하다.

 

불교사원 소림사를 가까이에서 보려면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야 한다. 소림사를 구경하는 것인지 관광객을 구경하는 것인지 사람들과 연신 부딪힌다.

 

소림사는 서기 496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발타(跋陀)가 세운 소승 불교사원이었는데 남송 시대에 이르러 달마(達摩)가 소림사를 복원하게 된다. 이때 소림사는 달마의 대승불교 사원으로 바뀌게 되고 선종(禪宗)의 주류가 된 소림사는 무림도장을 겸해 지금에 이르렀다.

 

무공을 연마한 소림사는 당나라를 건국한 이세민을 돕고 공을 세워 번성하게 된다. 송나라에 이르러 5천 칸이나 되는 큰 사원이 되었으며 2천 명에 이르는 스님들을 보유하게 됐다고 한다. 청나라 옹정제는 소림사의 반란을 견제해 방화단을 보내 불을 질렀다. 1928년에도 군벌 스여우싼(石友三) 역시 다시 방화를 해 많은 유산이 소실됐다고 한다. 중국 건국 후 여러 차례 중건해 현재 3만 평 규모의 사원으로 보존되고 있다.

 

산 중턱에 이조암(二祖庵)이 있는데 한가운데 사당이 있고 양 옆에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뿜어 나오는 샘 2개가 있다. 1위엔을 내면 종이컵 하나를 주고 물을 마시게 해주는데 그 맛이 약수처럼 약간 시큼하다. 그런데 양쪽 샘물의 맛이 서로 다른 것은 정말 야릇했다.

 

소림사 무술모형(왼쪽 위), 소림사 무술공연장(왼쪽 아래), 소림사(오른쪽)

 

산을 내려와 소림무술 공연장으로 가서 기다렸다. 1000여 명을 수용하는 공연장은 인산인해였다. 다행히 무대 앞줄이 약간 비었기에 체면 불구하고 헤집고 들어가 앉았다.

 

무공 시연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중국어와 영어로 사회를 보는 아가씨가 공연 시작을 알리자 머리 빡빡 깎은 젊은 무공 수련생도들이 나타난다. 창이나 칼 등 다양한 무기를 들고 현란한 동작을 선보인다

 

동물들 동작을 응용해 만든 권법을 선보이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것인데도 아주 재미있다. 야생동물의 날카로운 장점을 살린 권법으로 아기자기한 맛도 있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며 박력도 있다. 역시 직접 보니 생동감이 넘친다.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소림무공은 흥미진진하다. 아무리 연기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합소리와 날고 뛰고 구르는 소리도 바로 앞에서 다 들린다. 악당을 물리치려면 대련 연습을 잘 해야 하겠다. 실전 같은 대련도 있다. 역시 소림 무공이라 칭찬해줄 만하다.

 

관객과 함께 하는 시간도 있다. 소림무공 따라 배우기 또는 흉내내기 정도 일까. 관객 3명을 나오라고 해서 소림 무공을 그대로 따라 하도록 하는데 관객과 호흡하는 것도 좋은 생각인 듯하다.

 

아시아에서 최고의 개런티를 받는 영화배우 리롄제(李連傑)처럼 유명해지고 싶은 것일까. 소림무공을 선보이는 학생들의 공연이 영화배우처럼 멋진 포즈다. 소림사에서는 꼭 이 공연을 봐야 한다. 입장료에 공연 관람이 포함된 가격이니 놓치면 후회할 것이다.

 

7)   뤄양洛陽 이 석굴 처음 본 사람 얼마나 놀랐을까

 

중원의 고대도시 뤄양(洛陽) 시내 중심에서 약 20km 떨어진 룽먼(龍門)까지 시내버스로 거의 1시간이 걸린다. 룽먼에 도착해 부지런히 석굴 입구로 갔다. '세계문화유산'이라고 새긴 바위가 먼저 눈에 띈다. 입장료가 꽤 비싼 편이라는 것과 거의 동의어이다.

 

룽먼에는 이허(伊河)라는 강이 흐른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있는 석굴을 서산석굴, 동쪽에 있는 석굴을 동산석굴이라 한다. 남북조 시대 북위 정권이 다퉁(大同)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이후 다퉁의 윈강석굴(雲岡石窟)를 세운 숭불정신을 기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멋진 번자체로 용문(龍門)’이라 새긴 곳이 석굴 입구인데 강을 연결하는 두 개의 다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입구를 지나 오른쪽으로 절벽을 따라 오르니 서로 다른 생김새의 석굴과 불상이 계속 이어진다.

 

23년에 걸쳐 무려 80만 명이 동원돼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열정이 놀랍기도 하고 동원된 사람들의 고통 또한 전해진다. 크고 작은 불상과 조각상이 바위와 동굴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으니 일일이 다 보기에 너무나도 많다.

 

봉선사(奉先寺)는 너비가 30m에 이르는 이곳의 최대 석굴이다. 무측천이 사비를 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한가운데 우뚝 선 로사나대불(盧舍那大佛)은 머리가 4m, 귀가 1.9m이고 전체 높이가 17.14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로사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신불 중 하나이다.

 

좌우에는 부처님을 측근에서 보좌한 아난다존자(阿難)와 부처님 사후 교단을 이끈 까사빠존자(迦葉) 그리고 금강(金剛)과 신왕(神王)의 조각상이 보좌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임에도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엷은 미소와 철학까지 담은 듯한 빼어난 예술적 감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걸작이다.

 

룽먼석굴 대불(왼쪽 위), 향산사(왼쪽 아래), 룽먼석굴 입구(오른쪽)

 

강을 건너면 동산석굴이다. 산세가 좀더 험해 보이는데 동산석굴에서 바라본 봉선사 석굴과 불상은 더욱 멋져 보인다. 문득 뱃사공이 강을 오르다 저 거대한 불상을 봤다면 얼마나 놀라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산석굴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자그마한 불교사원 향산사가 있다. 산 중턱에 자리잡고 강을 내려다보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백거이(白居易)를 비롯해 많은 문인과 승려들이 즐겨 찾던 곳이라 한다. 청나라 건륭제도 다녀갔으며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이곳에서 피서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시인 백거이는 룽먼에서 '향산거사'라는 별호처럼 향산사에서 강을 바라보며 여생을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백거이의 묘원인 바이위엔(白苑)이 이곳에 있다.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서늘하고 풍경 좋은 찻집이 있다. 거문고 소리 들으며 향 좋고 맛깔 나는 차 한잔 마신다면 도저히 발걸음을 떼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8)   뤄양洛陽 수급만 남아 이곳에 관우는 잠들었다

 

룽먼석굴에서 1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다시 20여분 걸어가면 소설삼국지의 영웅인 관우의 무덤인 관린(關林)이 있다. 손권이 관우를 죽이고 조조에게 보내 그 누명을 떠넘기려 했는데 조조가 관우 주검을 아주 성대히 장례를 해줬다고 한다.

 

인용과 충의의 상징 관우는 중국사람들이 신으로까지 받들어 모시며 관공이라 높이 부른다. 가는 곳마다 관제 묘 또는 사당이 있다. 관린에도 관우의 조각상이 있고 양 옆에는 그의 아들인 관평(關平)과 부하장수 주창(周倉)이 나란히 서 있다.

 

관우의 수급이 있는 무덤 관린은 실제로는 명나라 때인 1592년에 사당으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 때에 이르러 150여 칸이나 되는 규모로 발전했다. 그의 사당은 종교의 혼합체 같은 느낌을 준다. 더구나 관우는 재물 신으로 추앙 받는 서민들의 영웅으로 자리잡은 인물이다.

 

관제총(關帝塚)에 이르면 돌 패방(牌坊) 있고 그 뒤에 무덤이 있다. 실제로 무덤 앞에 서면 다소 답답한 느낌이다. 좁은 공간에 차례로 서 있는 패방과 정자처럼 생긴 베이팅(碑亭)이 연이어 있어서 그렇다. 무덤을 한 바퀴 돌아보니 8각형 모양으로 높이가 10m, 너비가 250㎡에 이르고 단단한 돌로 외벽이 꾸며져 있어 단단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덤을 한 바퀴 돌아보고 빠져 나오는데 삼국지에서 천리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전장을 나부끼던 그의 수염을 매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록 역사에서 큰 꿈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많은 이들로부터 추앙 받는 관우를 떠올려 본다.

 

관우 조각상(왼쪽), 관린 입구(오른쪽 위), 바이마쓰 입구(오른쪽 아래)

 

뤄양 기차역에서 버스 타고 약 40분 정도 동쪽으로 가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이라는 바이마쓰(白馬寺)가 있다. 동한시대인 서기 68년에 세워진 불교사원이라고 하는데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후 처음으로 세워진 사원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한나라 명제(明帝)가 어느 날 금빛 찬란한 선인이 황궁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신하들에게 물으니 그 선인이 천축의 '부처'라고 했다고 한다. 천축(天竺), 즉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온 승려를 위해 황제의 명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백마 두 마리에 불경을 싣고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사원 입구는 물론이고 곳곳에 백마상이 서 있다.

 

불교가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고 3국 모두 불교를 숭상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한국 불교계가 세운 비석과 일본 불교계가 세운 조각상이 있다. 바이마쓰의 역사가 지닌 상징적 의미가 되새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느 불교사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특이한 것은 사원 제일 안쪽에 있는 피루거(毗盧閣) 벽면에는 최초의 불경 번역인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한 가운데 동근 문을 통과해 되돌아 나오는 길이 참 멋지다. 들어갈 때는 건물 안에 있는 불상들을 살피느라 정신 없이 지나갔다. 좌우로 길게 뻗은 길이 이렇게 긴 것인지 몰랐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