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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10회 랴오닝 2 – 고구려 산성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다

 

 

5) 환런 桓仁 혼자 보기 아까운 고구려 산성의 흔적

 

랴오닝 환런에 도착한 후 다시 10여 분 더 달려가면 우뉘산(五女山) 산성이다. 입장권을 사고 산성까지 가는 전용차량으로 갈아타야 한다. 멀리서도 우뉘산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가파르게 솟아있는 독특한 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로가 아주 지그재그이다.

 

산을 다 보려면 2시간 이상 걸린다고 한다. 자그만 산성 하나 오르는데 아무리 길어야 1시간이면 될 줄 알았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바로 가파른 스바판(十八盤) 등산로가 나타났다. 태산의 등산로와 이름이 똑같다. ‘이거 참 예상에 없던 고생길이 될 듯하다. 태산보다야 덜 하지만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쉼 없이 올라가야 하는 것은 비슷하다.

 

스바판을 벗어나니 평지가 나온다. 등산 표지판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산성에 대한 사전 정보가 너무 없었나 보다. 그저 고구려 성터만 보면 만족이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뜻밖에도 자연풍광이 너무 좋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소나무 가지들이 정말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절벽에 기대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소나무들이야말로 별미 같은 풍경이다.

 

하오한쑹(好漢松) 앞에 멈췄다. 산 아래가 훤히 보이고 아슬아슬하게 뿌리 박은 소나무는 바람과 함께 늘 흔들리지만 좋은 벗처럼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을 것 같다.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소나무를 보면서 친구에게 건네듯 혼자 말도 저절로 나온다. 바람만이 적막을 깬다. 간혹 새소리도 들리긴 하지만 우뉘산성의 바람은 구름을 떠안고 갈 정도로 강렬하다.

 

즈메이챠오(妹橋)는 절벽과 절벽을 연결해주고 있다. 다리 아래로 가서 보니 더욱 경이롭다. 산 아래에서 엄청난 속도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세찬 바람에 마냥 흔들리면서도 의연한 자태를 유지하고 절벽에 매달린 모습들이 아주 강인해 보인다.

 

우뉘산의 톈츠(왼쪽), 우뉘산에서 본 하늘과 호수(오른쪽 위), 고구려 성터(오른쪽 아래)

 

우뉘산에는 다섯 개의 돌무덤인 우뉘분이 있다. 항일전투 시기에 사망한 다섯 명의 여성 전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우뉘분을 지나면 톈츠(天池)라는 연못이 있다. 연못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그 빛깔만큼은 예술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이 파란 하늘보다 더 짙고 푸르다. 연못에 왜 커다란 옛날 상평통보 같은 동전을 띄웠는지 모르지만 그 위에 사람들이 던진 동전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호수 위에 뜬 수초를 건지고 있는 사람의 중요한 수입원일 지도 모른다.

 

산 아래에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드넓게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니 그 경치가 한 폭의 멋진 동양화 위에 파란색 물감을 쏟은 것처럼 느껴진다. 파란 하늘과 호수의 조화가 너무나 아름답다.

 

이제 서서히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갑자기 가파른 계곡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이셴톈(一線天)이라 부른다. 하늘로 오르는 한줄기 줄이란 뜻인데 중국 산에 오르면 간혹 이 이름을 만나게 된다. 대체로 아주 절경이거나 가파른 길에 많이 붙어있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정말 절벽 사이에 좁게 난 길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가파르고 좁은 길을 내려가자니 위태위태하다. 양 갈래길이 있는데 망설이다 보다 안전한 길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다른 쪽 길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다. 이런 장면을 놓칠 수는 없다. 급한 마음에 후다닥 뛰었는데 아차 할 찰나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신기하게 왼손에 캠코더, 오른손에 카메라 들고 뛰었는데, 왼쪽으로 넘어지면서 무의식 중에 왼손 등으로 땅을 짚고 등으로 넘어졌다. 오른쪽 앞발이 분명 돌부리에 걸렸는데 왼쪽 종아리만 살짝 긁혔다. 장비는 모두 무사했다.

 

우뉘산 성터에 도착했다. 고구려 산성이라는 표시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한참 동안 이리보고 저리보고 아래로 내려가서 보고 옆에서도 보고 해도 그저 돌로 지은 얕은 성곽일 뿐이다. 가지런하고 빈틈이 없지만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듯 돌들은 균열도 있고 그 틈새에서 풀들이 자라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고구려성(高句麗城)’이라거나흘승골성(紇升骨城)’ 아니면졸본성(卒本城)’ 또는홀본성(忽本城)’이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못하고우뉘산산성(五女山山城)’이라 불리는 것도 아픈데 성터의 모양새가 너무 외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문득 입장권을 펼쳤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북부여 왕자 주몽이 건립한 지방정권’(據史料記載, 北扶余王子朱蒙建立高句麗政權)이라는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중국은 55개 소수민족의 역사 전부를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란 말로 치부한다. 마음에 거슬리는 말이지만 흥분할 일도 아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곳에 성을 쌓았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마음이 뿌듯하다. 고구려를 건국한 지도자와 그의 뜻에 따라 성을 쌓았던 우리 병사와 일꾼들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지친 마음을 달랬고, 세차게 부는 바람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남북한 모든 동포들과 함께 이 자리에 서서, 멋진 역사의 현장을 함께 보고 싶다.

 

6)   션양 瀋陽 잔디 아래 누워 있는 청나라 개국의 영웅

 

션양은 랴오닝 성의 수도이자 중국 중원으로 진출해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고향이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의 7대도시로 성장한 동북 중심도시이다.

 

션양 시내에는 청나라 태종 황태극(皇太極)의 묘원인 자오링(昭陵)이 있다. 태조인 누루하치(努爾哈赤)의 능원인 푸링(福陵)과 누루하치의 아버지를 비롯해 조부, 증조부, 고조부, 백부 등 친족 능원인 용링(永陵)과 함께 관와이싼링(關外三陵)이라 불린다. 관와이라 함은 산하이관(山海關) 바깥을 말한다.

 

자오링은 베이링궁위엔(北陵公園)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공원 안에 있다. 공원에 들어서면 길게 뻗은 길이 보이고 정면에 황태극의 동상이 보인다. 동상 오른쪽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왼편은 중일(中日) 우호를 상징하는 자그마한 정원들이 있다. 중화민국 시절인 1927년에 조성된 공원이고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여느 지방 호수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마침 한 가족이 환갑잔치 겸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조선족 동포이다. 우리 민족은 환갑과 같은 효심이 담긴 행사에는 아들이 부모를 업어주기도 한다. 아들 등에 업혀 웃는 할아버지의 밝은 웃음과 친지들의 화기애애한 장면을 보니 기분이 좋다.

 

1651년에 만들어진 자오링을 들어서니 그야말로 고궁의 분위기가 확 풍긴다. 산시(陝西) 셴양(咸陽)에 있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능묘를 탕자오링(唐昭陵), 베이징 밍스싼링(明十三陵)에 있는 명나라 12번째 황제인 목종 주재후(朱載垕)의 능묘를 밍자오링(明昭陵)이라 부르는데 이곳은 청나라의 칭자오링(昭陵)인 것이다.

 

자오링의 황태극 동상(위쪽), 자오링 용 벽화(왼쪽 아래), 황태극 무덤(오른쪽 아래)

 

왜 이렇게 자오()라는 말을 즐겨 쓰는 지 궁금하다. 자오란 말은 환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날 일() 자가 있고 부를 소()자가 합쳐진 것인데 이 소 자는 사원이라는 뜻도 있다. 아마도 언제나 해가 떠 있는 사원이라는 의미를 담아낸 것일 지도 모른다.

 

멋진 아치인 패루와 정훙먼(正紅門) 양 옆으로 용 무늬가 새겨져 있는 벽에 시선이 머문다. 역시 용은 황제의 상징이다. 주홍색 벽면에 짙은 분위기를 풍기는 녹색 용이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다. 잘 어울리는 색의 조화도 멋지지만 웅비하는 듯한 자태가 볼수록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용의 진면목을 잘 볼 수 있다.

 

정훙먼을 지나 길게 뻗은 션다오(神道)를 따라 걸어가면 바로 정면에 베이팅(碑亭)이 보인다. 그 뒤로 몇 개의 건물을 더 지나면 팡청(方城)에 둘러 쌓인 능묘가 나타난다. 팡청을 지나면 양 옆으로 누각()과 건물(殿)이 각각 2개씩 동서로 위치하고 있다.

 

자오링의 묘를 자세히 둘러보려면 팡청 위 성곽으로 올라가야 한다. 성곽 위에 오르니 시야가 넓어지면서 묘원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성곽 위로 난 길을 따라가면 초승달 모양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서 있는 위에야청(月牙城)이 보인다. 그 뒤가 바오청(寶城)이고 그 중심에 바오딩(寶頂)이 있으며 그 아래에 디궁(地宮)이 있다. 디궁이 바로 황태극의 무덤인 것이다.

 

성곽 위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독특한 구조로 이뤄진 자오링의 모습을 지켜본다. 바오딩 위에 오롯이 자란 나무 한 그루가 참으로 동그랗게 꾸며져 있다. 무덤 위에서 자라서인지, 원과 원으로 서로 묶여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평화롭게 보인다.

 

중국 어느 황제의 무덤보다 더 인간적이구나 생각했다. 무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두루 다 둘러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왕조에 치욕을 안겨준 황태극의 무덤, 만주벌판을 달리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 이렇게 큰 원으로 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7)   션양 瀋陽 물로 쓰는 붓글씨로 한국을 쓰다

 

길 위에 물로 붓글씨를 쓰는 한 아저씨와 만났다. 예전에 한국 MBC 취재진이 자신이 쓴 글씨를 취재해 갔다고 자랑한다. 그래서 뭐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지 살펴봤다.

 

이 아저씨는 관광객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재미난 사람이다. 다가가니 대번에 한국사람인 줄 알고 바닥에 '한국'이라고 쓴다. 재미있는 것은 ㅎ 다음에 ㄴ을 먼저 쓰고 ㅏ를 쓴다는 것이다. 보고 베끼기는 해도 한글의 수순은 배우지 않은 듯하다.

 

타이완 사람들이 지나가니 '대만'의 대()자도 쓴다. 거꾸로 글씨를 쓰는데 정확하게 모양새를 잘 갖춘다. 그러고 보니 글씨를 쓴다기 보다는 어떤 것이라도 잘 그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

 

시안에서 물붓 쓰는 아이(왼쪽), ‘MBC’라 쓰고 있다(오른쪽 위), ‘한국’이라 쓰고 있다(오른쪽 아래)

 

한국 MBC에서 자신을 3일 동안 취재했다고 자랑한다. '()' 글자를 2,500평방미터의 공간에 썼다고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조금 실망한 듯하다. MBC를 잘 안다는 듯 영어도 쓰고 숫자도 쓴다. 그러니까 가로 세로 50미터씩 글자를 썼다는 것인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국 공원에는 이렇게 물을 묻혀 붓글씨는 쓰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렇게 먹 대신에 물로 거리에서 붓으로 쓰는 글씨를 쉐이슈(水書, 또는 디슈地书)라고 부릅니다. 산둥에서도, 허난에서도 봤으며 산시의 시안 다옌타(大雁塔)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귀엽게 글씨를 쓰는 것을 봤다.

 

베이징 이허위엔에서는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며 하루 종일 붓글씨를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자신의 수행이며 글씨 연습이라고 한 기억이 난다. 물로 쓰는 것이라 금방 글씨들이 지워진다. 어쩌면 종이 위에 까만 먹으로 자신의 필체를 남기려는 마음보다 더 진정한 글쓰기가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사실 이런 물 붓글씨는 홀로 외로이 수행하는 의미가 있는데 요즘은 관광지마다 갈수록 상업화되는 측면도 있어서 다소 아쉽다. 말 없이 하루 종일 붓을 휘날리면서 마음 속 고뇌를 다스린다면 참으로 멋진 모습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렇게 한가한 여유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8)   션양 瀋陽 천수 누린 동북군벌의 사랑과 결혼이 아름답다

 

션양 시내 중심에 있는 장스솨이푸(張氏帥府)로 갔다. 장스솨이푸는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기의 동북군벌인 장작림(張作霖)과 그의 아들 장쉬에량(張學良)의 옛 집이자 관청이다.

 

장스솨이푸는 동북군벌 장작림(1875~1928)의 다솨이푸(大帥府)와 그의 장자인 장쉬에량(1901~2001)의 샤오솨이푸(小帥府)로 나누어진다. 관저이기도 하고 사택이기도 한 이 옛 건물의 모습은 당시 동북군벌의 힘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용마루와 처마가 가지런한 벽면에는 홍시(鴻禧)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기러기처럼 다정해야 행복이 생긴다는 뜻인가 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문을 들어선다. , 싼진(三進) 쓰허위엔이라 할 수 있다. 전통양식과 민속적인 풍모가 조화된 건축물로 각광받을 만하다.

 

수령이 꽤 됐을 법한 나무들이 마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장작림의 가계도가 있고 당시 동북군벌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다. 복잡한 가계도를 지닌 장작림의 일생을 보니 예전에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인 <안개비연가>가 생각난다.

 

동북군벌인 아버지와 8번째 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핑(依萍) 역할을 한 자오웨이(趙薇)를 중심으로 1900년대의 슬픈 가족사를 그린 드라마이다. 의협심 강하고 다감한 신문기자 슈환(書桓) 역할을 한 구쥐지(古居基)와 재치 있고 다소 덤벙대지만 착한 사진기자 두페이(杜飛) 역할의 쑤여우펑(蘇有朋), 마음씨 착한 루핑(如萍) 역할의 린신루(林心如) 등이 출연한 드라마인데 아마 기억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원래 제목은 '칭션션위멍멍(情深深雨濛濛)'으로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자오웨이의 슬프면서도 귀여운 모습이 떠오른다.

 

이 장스솨이푸에서 가장 백미로 꼽히는 건물은 다칭루()입니다. 장작림이 구상해 건축했다고 하는데 유럽식 풍의 웅장한 3층 건물이다. 실내에도 아주 세심하게 기획된 건축물이면서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각 방마다 꾸며놓은 장식들도 당시 위세 등등했던 군벌의 힘을 과시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다칭루 동쪽 구석에 작은 사당이 하나 있다. 집안에 조성된 가묘라고 볼 수 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관제 묘이다. 장작림은 관우를 매우 숭상했던 인물이라 전해진다. 그래서 장스솨이푸 내에 관우를 모셨다고 한다. 규모가 크지 않고 한쪽 구석에 있어 언뜻 지나치기 쉽다. 따로 관제 묘를 지키는 아가씨가 하루 종일 지키고 서 있다.

 

동북군벌의 장스솨이푸(위쪽), 장스솨이푸 내 관우사당(왼쪽 아래), 자오이디 고거(오른쪽 아래)

 

맏아들 장쉬에량은 아버지 장작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자 민족주의자이면서 반일감정이 아주 강했다. 결국 정치적, 군사적으로 동지인 장제스가 반일투쟁보다는 옌안에 있던 마오쩌둥 부대에 대한 공격에 힘을 집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장제스를 체포한 서안사변을 일으킨다. 세계사에서도 유명한 사건인 서안사변으로 역사적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유약했던 장쉬에량은 장제스의 영향력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후 타이완과 미국 하와이 등지에서 거주하였으며 100세를 넘기는 천수를 누렸다. 어린 시절부터 경비행기를 타고 만주벌판을 날아다녔던 그는 술과 담배, 마약으로 여생을 보냈음에도 장수를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3번 결혼했는데 본처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동거했으며 천수를 함께 누렸던 자오이디(趙一荻)가 살았던 집이 바로 옆에 있다. 홍콩에서 태어난 그녀는 한눈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품위가 있고 아름다워 마치 비단처럼 빛나는 노을 같다고 해 치샤(綺霞)라고 불렸다고 한다.

 

홍콩에서 태어난 그녀는 베이징에서 처음 만난 장쉬에량이 션양으로 부르자 1928년부터 3년간 거주했다. 이 집은 그녀가 스스로 설계하고 장식한 집이라 한다. 장스솨이푸가 남성적인 모습이라면 이곳은 아주 섬세한 여성의 손길이 깃든 집이라 할만 하다.

 

1925년에 결혼한 본처인 위펑즈(于鳳至)는 장쉬에량과 1963년 합의 이혼한다. 이때 위펑즈는 장쉬에량에게 편지를 보내 둘의 사랑은 정말 순수하고 맑다. 특히, 치샤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으며 인격이 높고 절개가 곧다. 당연히 둘은 생사를 함께 해야 한다.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환갑이 넘은 나이의 장쉬에량과 자오이디는 1964년에 정식으로 결혼한다. 그리고 2000년에 자오이디가 사망하고 그 다음해에는 장쉬에량이 사망한 후 합장된다. 3년 간의 짧은 동거 후 다시 40년이 흐른 후에도 변함 없이 사랑했기에 힘들게 결혼한 그들은 다정했던 노년이 자주 언론에 회자되곤 했다.

 

진정한 사랑으로 장수하며 여생을 함께 할 수 있던 그들이 한없이 부럽기도 하다. 장쉬에량과 자오이디 두 사람의 삶을 보니 진정한 사랑 그리고 결혼이란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