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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16회 간쑤 1 실크로드 위에 있는 만리장성 서쪽 끝자락에 올라



간쑤 성은 길게 동서로 뻗어 있는데 우웨이(武威), 장예(張掖), 쥬취엔(酒泉), 자위관(嘉峪關), 위먼(玉門), 둔황(敦煌)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상의 주요도시들이 연결돼 있다.


유명한 허시저우랑(河西走廊)은 남쪽으로는 치롄산(祁連山), 북쪽으로는 허리산(合黎山)과 룽셔우산(龍首山)을 장벽으로 좁고 긴 평야 지대로 우챠오링(烏鞘嶺)에서 시작된 길이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장 1000km에 이른다. 신장(新疆)과 중앙 아시아를 왕래하는 실크로드 주요 통로이었으며 지금도 우루무치로 가는 철로와 국도가 이어져 있다.


간쑤 성의 수도인 란저우는 실크로드 길을 따라 우루무치(烏魯木齊)로 가거나 칭장(青藏)고원을 거쳐 티베트 라싸로 가는 기차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국 서북부 최대의 교통 요지이다. 동쪽으로 시안(西安)을 지나 중원 땅으로 가거나 남쪽 쓰촨(四川)이나 북쪽 네이멍구(內蒙古)로 가려고 해도 이곳을 통해야 한다.


란저우를 비롯해 치롄산을 넘어 도착한 장예, 만리장성의 서쪽 관문인 자위관과 둔황의 마오가오굴과 오아시스가 있는 밍사산으로 함께 가보겠다.


1)   란저우 蘭州 세상에서 가장 맛 있는 밥을 먹다


간쑤 성 수도 란저우 시내를 황허(黃河)가 흐른다. 6397킬로미터의 창장(長江)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5464킬로미터의 기나긴 강이다. 중국문명의 발원을 이끈 강이기도 하다. 황허는 쿤룬산맥(昆侖山脈) 동쪽 칭하이(青海) 성의 해발 4800미터 지점에서 시작해 산둥(山東) 성 보하이(渤海) 만까지 이어지는 강이다.


바이타산을 서서히 오르니 황허가 점점 한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멋진 빌딩들 모습이 드러난다. 나무줄기 사이와 고풍스런 집 지붕 너머로 누런 강물이 흐르고 철교는 수직으로 이어졌다.


산 중턱에 오르니 황허 기석관(奇石館)이라는 수석(水石) 전시관이 있다. 동물이나 사람, 산이나 강 또는 해와 달과 같은 자연현상을 연상하는 독특한 돌들이 많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나오는 돌로 만든 공예품을 팔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보지 못하던 것이라 ‘원숭이’와 ‘소녀’를 각각 10위엔 주고 하나씩 샀다.


다시 산을 올라가니 바이타가 보인다. 바이타는 원래 원나라 시대 칭기스칸이 초청한 티베트 라마 승려가 이곳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바이타는 청나라 강희제 시대인 1715년에 17미터 높이의 8면 7층 탑으로 중건하고 사원이름을 자은사(慈恩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라마 불교의 상징인 바이타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초기의 백색토는 사라지고 은은한 단청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바이타가 세워져 있는 곳은 아주 좁다. 탑을 관리하는 집 한 채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골동품을 파는 가게이기도 하다. 시장을 상징하는 여러 상품들이 전시돼 있으며 라마 승려를 상징하듯 코끼리 등에 올라탄 북인 상피고(象皮鼓)가 인상적이다.


바이타 옆에는 2개의 아담한 정자가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을 동풍정(東風亭)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것을 희우정(喜雨亭)이라 하는데 바람과 비의 정서가 서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란저우의 바이타(왼쪽), 바이타산에서 본 황허(오른쪽 위), 바이타산에서 만난 아주머니(오른쪽 아래)


가만 생각해보니 점심도 못 먹고 올라 왔다. 더위에 지쳐 산 정상 희우정 부근에서 물 한 병을 마시고 황허를 바라보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저녁 먹었냐고 인사말을 건넨다.


오후 5시인데 중국 사람들은 저녁을 일찍 먹는 편이라 수인사 겸해서 물은 것이다. ‘점심도 안 먹었다’고 하니 밥 한 그릇에 야채 반찬 하나를 가져 온다. 갑자기 밥을 보아서인지 허겁지겁 먹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맛이 좋다.


아주머니는 밥 먹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궁금한 것을 묻는다. 어디서 왔냐, 왜 밥을 아직 안 먹었느냐, 내려갈 때 조심해 내려가라고 마치 아들을 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잔소리까지 한다.


바이타산을 서서히 내려간다. 이번에는 다른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의외로 사원이나 정자, 돌계단들이 장 정돈돼 있다.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곳곳에 많다. 올라올 때의 황허의 모습과 달리 내려가면서 보는 황허도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저녁에 베이징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1식 1찬을 먹었다고 하니 ‘그렇게 좋은 사람이 중국에 있던가요?’ 라고 한다. 정말 여행을 떠난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별미라 하겠다.


바이타산에서 선뜻 밥을 내어준 아주머니의 마음씨가 자꾸 마음에 남는다. 이런 따스함은 밥의 온기 그 이상이다. 180일 동안 중국 곳곳을 다 다녔어도 이런 친절은 받아본 적이 없다. 말도 소박하게 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주머니의 눈길이 자꾸만 떠오른다. 세상에서 가장 맛 있는 밥맛을 잊을 수가 없다.


2)   란저우 蘭州 황토 빛깔 넘치는 황허 위로 노을이 지니


란저우 황허에는 중산챠오(中山橋)가 있다. 1907년 독일 상인들이 건설한 것으로 100년이 흘렀음에도 웅장하고 탄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황허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되었다 해서 붙여진 ‘황허 제일의 다리(黃河第一橋)’는 총 길이 233.33미터, 넓이 7미터이다.


‘황허철교’라 불리다가 1942년에 쑨원의 호를 따서 중산챠오로 이름을 바꿨다. 정말 삼민주의자 쑨원은 중국사람들 속에 깊이 각인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수많은 공원이나 거리마다 그의 호를 딴 지명이 많고 그의 고향은 아예 중산시가 됐다.


차량이 통제된 다리 위를 날렵하게 지나다니는 것은 자전거이다. 자전거와 사람이 어울려 다리 위는 온통 북새통이다. 강 위에는 쾌속정이 시원하게 잘 달린다. 강 남단으로 건너가니 거북이 석상 위에 ‘황허디이챠오’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서 사진 찍는 사람들로 또 북적댄다.


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러 나왔다. 가족들과 함께 산보도 하고 유람선도 타고 데이트도 즐기는 서울의 한강변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강물의 빛깔은 황토 때문이겠지만 차이가 많다.


솜사탕을 먹는 아이들, 그림 그리는 사람들, 체조하는 사람들 모두 저녁 무렵의 황허의 노을과 낭만을 즐기고 있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강 모래사장으로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장난감 삽으로 모래놀이를 하고 있고 연인들은 서로 껴안고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물속에서 개 한 마리가 헤엄을 치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는데, 알고 보니 주인이 훈련을 시키는 중인가 보다. 헤엄을 쳐 강변으로 나온 털북숭이 개가 몸을 흔들며 물기를 털어내고 있다.


란저우 황허 강변(왼쪽), 중산챠오(오른쪽 위), 황허 야경(오른쪽 아래)


해가 지자 황허의 모습이 점차 변한다. 흙탕물이던 색깔이 노을에 비쳐 점점 붉어지더니 금방 사라지고 말 태세이다. 황허를 질주하는 쾌속정들이 강물의 흐름을 바꿀 듯 빠르게 요동치고 있다.


완전히 밤이 되니 멋진 밤의 향연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강변에 있는 식당의 조명이 강물 위로 반사돼 황홀한 장면을 연출한다. 중산챠오의 불빛은 하얀 아치를 그리고 있다. 밤이 되자 연인들은 더욱 노골적이 된다. 역시 야경은 강변을 끼고 있어야 멋진 것인가 보다. 중산챠오 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야경을 구경하고 있다.


가로등도 밝아서 길을 환히 비추니 강변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대낮에는 황토 빛이었다가 밤이 되니 이렇듯 멋진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것 역시 경제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강변을 따라 빌딩 숲이 강물 위로 불빛을 반사하니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야경이다.


3)   자위관 嘉 실크로드 위에 있는 만리장성 서쪽 끝자락에 올라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에 도착했다. 동쪽 끝자락인 산하이관을 지난 지 벌써 40일이 지났다. 산하이관부터 만리나 떨어진 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서둘러 창청(長城)으로 갔다.


명나라 시대 만들어진 서쪽 끝 쉬엔비(懸壁)이다. 물론 한나라 시대 서쪽 끝 경계는 위먼관이 있긴 하지만 영토의 개념이 아닌 군사적 개념의 명나라 창청은 이곳에서 끝이 난다.


중국정부가 만리장성의 길이를 정확하게 새로 재겠다고 하더니 동북의 하얼빈 및 만주벌판부터 위먼관 너머까지 성곽의 흔적은 모조리 주워담고 있다. 그래서, 만리장성의 길이를 4천 킬로미터가 아닌 6천7백 킬로미터라거나 심지어 1만 킬로미터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만리장성은 원래 기원전인 춘추전국시대의 조(趙)나라와 연(燕)나라의 성곽을 진(秦)나라가 확장해 쌓기 시작했다. 진시황은 당시 인구의 1/20이나 되는 100만 명을 동원해 험준한 산에다 성을 쌓는 살인적인 공사를 했던 것이다.


자위관 시내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헤이산(黑山) 북쪽 비탈에 쉬엔비 창청이 자리잡고 있다. 성곽마다 망루가 있는데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원래 한나라 시대부터 망루의 형태가 있었는데 명나라 시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망루 옆으로 창청을 쌓은 것이라고 한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숨이 가쁘다. 섭씨 30도가 넘는 한낮 오후여서 그런지 숨이 차고 땀도 솟는다. 대신에 올라갈수록 전망이 넓어지니 시야는 훨씬 시원하다. 멀리서 바라보니 검은 빛이 감도는 민둥산 헤이산에 파란 하늘, 흰 구름이 잘 어울린다. 생긴 모습이 베이징 부근 바다링(八達嶺) 장성과 비슷하다고 해서 서쪽 지방의 바다링이라 부른다.


강성한 북방민족의 침입을 우려한 대부분의 왕조는 틈만 나면 성을 쌓았다. 한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쌓아 지금에 이른다.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 자위관까지 이어지는 이 기나긴 산봉우리마다 관문이란 뜻의 관(關)이나 커우(口), 보루라는 뜻의 바오(堡)나 싸이(塞), 또는 청(城), 타이(台), 러우(楼), 링(嶺) 등 약 150여 곳의 방어 개념의 지명이 있다. 그 중 관이라 이름 붙은 곳은 대체로 관청이 있고 군인이 상주한다.


좁은 망루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여행객 몇 명이 올라온다. 외국에 사는 화교 일가족이 여행은 온 듯하다.


쉬엔비 깃발(왼쪽 위), 쉬엔비 창청(왼쪽 중), 낙타(왼쪽 아래), 실크로드 조각상(오른쪽)


오를 때는 창청 계단을 따라 가파르게 올랐는데, 망루를 통과하고 나니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편안한 길이 있다. 이 길이 오히려 성곽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에 훨씬 좋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산의 형세가 아주 험난해 보이고 그야말로 요새라는 느낌이 든다. 병력이 상주하는 험준한 저 산을 넘어가려 하는 군대가 있을까 싶다.


이곳은 중국 왕조에게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도 했으며 실크로드 위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평지로 내려오니 최근(2005년)에 만들었다는 조각상이 있다. 실크로드와 역사적으로 인연이 있는 인물들의 석상인 것이다.


서역으로의 통로를 개척한 한나라 시대의 여행가인 장건(張騫), 흉노족 토벌 무장인 한나라 무장인 곽거병(霍去病)과 후한 시대의 반초(班超), 불법을 구하러 간 현장(玄奘), 동방 여행가 마르코폴로(馬可波羅), 그리고 청나라 말기 정치가인 임칙서(林則徐)와 서역의 반군을 평정한 좌종당(左宗棠) 등과 함께 수행원과 말과 낙타, 마차까지 조각돼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짜 낙타가 한 마리 서 있다. 쉬엔비 망루를 배경으로 낙타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꽤나 더워 보이는데 아랑곳 하지 않는다. 누군가 자기를 타 줘야 저녁 끼니를 때울 텐데 하며 무심하게 서 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자락에 오니 산하이관 라오룽터우부터 시작해 여기 자위관 쉬엔비까지 머나먼 문화체험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리장성에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창청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을 터이니 아주 의미 있는 일이 될 듯하다.


4)   자위관 嘉 만리장성 서쪽 끝에는 제비 우는 소리 나는 돌이 있다


쉬엔비 장성 남쪽에는 자위관 관청이 있다. 관청 안으로 들어가니 한 건물 옆에 코스모스가 피었다. 가을에 피는 꽃이 어찌 초여름에 피었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악기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마침 관청에서 멀리 전쟁을 떠나는 장수를 환송하는 행사가 곧 시작된다. 출정을 위해 관청을 떠나는 의식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니 재미있을 듯하다. 여행객 중에서 신청을 받아 각각 장군과 부인으로 분장했다. 물론 이렇게 분장하고 참여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


장수가 출정 선포를 하고 말에 올라탄다. 장수 뒤로 창과 깃발을 든 병사들과 취주대가 가고 낙타 위에 올라탄 부인들도 뒤따른다. 전통 복장으로 두루 겸비했으니 나름대로 잘 갖춰진 행사이다. 관청 안 건물 사이를 지나 문들을 지나 관청 후문 밖으로 나가더니 행렬이 멈췄다.


낙타에서 내린 부인들이 환송 술을 따라주면 장수들은 말에서 받아 마신다. 손을 흔드는 부인들을 뒤로 하고 전쟁터로 가는 의연한 모습이 연출되는 것이다. 100여 미터나 멀리 가던 말들이 되돌아오면 행사는 끝이 난다.


환송의식(왼쪽 위), 자위관(왼쪽 중), 관청사당(왼쪽 아래), 환송의식(오른쪽 위), 구루 상(오른쪽 아래)


자위관 관청은 명나라 시대인 홍무 5년, 1372년에 세워졌다. 외성과 내성 그리고 옹성(甕城)으로 구성돼 있는데 성벽 높이가 11미터에 이른다. 그 모습이 사뭇 웅장해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 하며 ‘변방의 요새’라고 불린다.


관청 성곽 위에는 길이 있어 걸어 다니면서 이곳 저곳 성 안의 구조를 지켜볼 수 있다. 주변이 온통 벌판인지라 멀리 눈 덮인 설산이 한눈에 보이기도 하고 서쪽 우루무치를 향해 가는 기차도 보이고 자동차도 보인다. 설산과 기찻길 그리고 관청 성곽이 나란히 보이니 참으로 독특한 장면이다.


관청 내 작은 사당이 하나 있어 들어갔다. 산하이관과 마찬가지로 장수들이 작전회의를 하는 모형이 있다. 벽에 새겨진 호랑이와 장수의 모습이 산하이관과 거의 비슷해서 놀랐다. 호랑이야말로 용맹의 상징이니 변방의 요새를 지키는 자위관이나 산하이관이나 다 잘 어울린다.


관청 안에 지스옌밍(擊石燕鳴)이라는 글자가 써 있는 바위 하나가 보인다. 돌을 치면 제비 우는 소리가 난다는 바위이다. 전설에 의하면 제비 한 쌍이 있었는데 어느 날 숫제비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암제비가 성벽에 스스로 부딪혀 죽었다 한다.


그 이후로 제비가 앉았던 바위를 돌로 치면 제비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중국사람들도 제비는 길조라 여겨 장군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 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이 돌을 치면서 무사히 돌아오라고 빌었다고 한다. 아이 하나가 돌을 치니 정말 제비가 찍찍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높은 성벽 때문에 아마도 그런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싶다.


관우의 사당도 있다. 서민들의 우상인 관우야말로 전쟁의 와중에 목숨이 위태한 병사들에게 위로가 될 존재일 것이다. 문무성신(文武聖神)이라는 현판이 붙었는데 문무를 겸비한 관우에 대한 존경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땡볕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해가 저물어 간다. 관청을 나서는데 장군 복장이 입고 사진을 찍는 곳이 있다. 갑자기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위엔으로 잠시나마 만리장성의 서쪽을 지키는 장수가 돼보니 나름대로 괜찮아 보인다.


관청 밖으로 나와 웅관서화원(雄關書畫院)이라는 팻말이 붙은 집이 고풍스러워 가까이 가봤다. 그 앞에 두 마리의 소가 쟁기를 끄는 석상과 마차를 끄는 말의 석상이 있다. 자세히 보니 얼뉴타이강(二牛抬杠)과 다구루처(大軲轆車)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 석상들은 춘추전국시대의 농경생활 모습을 구현한 것이라 한다.


구루(軲轆)라는 말이 뜻밖에 이곳에 있다니 의외이다. 발음이 구루라니, 그렇다. 구루마는 우리가 일본어에서 온 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말이다. 구루의 뜻은 ‘구르는 바퀴’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쓰던 말이 오히려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한자문화권 내에서 발음의 유사성이 있기 마련이니 애써 따지기 어렵다. 하여간 ‘구루마’와 ‘구루’의 연관성이 재미있다.


만리장성 서쪽 끝자락 관청에서 장수들이 출정하는 장면도 재미있고 제비소리에 무사귀환의 염원을 담은 전설도 흥미롭다. 그 옛날, 관청 위에 서서 설산을 바라보며 망을 보던 병사들이 볼 수 없던 열차소리가 귓전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