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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태백산 '호박엿 장수 가수'에 관한 글이 <다음> 메인에 붙어서 놀랐습니다. 주말에 어머니 병세가 좋지 않아 부산에 다녀오느라 몰랐는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라 말입니다.

사실, 아들 우혁이랑 태백산 눈꽃기차 여행을 다녀온 것은 나름대로 즐거운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태어난 곳을 보여주고 싶었지요. 그리고 저도 오랜만에 기억이라는 편린을 조금 꺼내보고 싶기도 했고요.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소도리. 제가 태어난 곳, '눈꽃기차'를 핑계로 그곳을 아들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사실 지금은 '눈꽃'이란 아름다운 수식이 붙었지만 제 기억의 곳곳엔 탄광촌에서의 유년시절이 더 강렬하게 떠오르는 곳입니다.


새벽부터 서둘러, 영등포역에 7시40분에 도착했습니다. 여행사 직원이 준 뱃지와 기차여행좌석권을 받고 도너츠로 아침을 해결하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우혁이는 폼나게 신문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별로 신문 볼 기회가 없었지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신문을 자주 보고 그러는 가 봅니다. 우혁이는 시사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아빠가 신문을 살 때마다 꼭 제가 보는 시간만큼의 양으로 신문을 보곤 합니다.



청량리역을 거쳐 태백역까지는 약4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태백역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20분 정도 가면 태백산 당골광장에 도착합니다.


식당 하나를 찾아 산채비빔밥을 주문하고 떠들썩한 광장을 나와봤습니다. 호박엿을 파는 수준급 아마추어 트로트가수 2명이 여장을 하고 흥을 북돋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흥겹고 정겨운 장면이었습니다.


우혁이가 쓴 빵모자가 파란하늘, 새하얀 눈과 잘 어울립니다. 눈만 좀 크게 뜨고 환하게 웃으면 좋으련만. 의젓한 것인지 저 표정은 가끔 냉정함도 묻은 것 같습니다. 이제 초등학생 티를 벗으려니 그런가요. 하여간 막 중학생이 될 아이가 진지한 표정이라니. 평소와 달리 카메라 앞에서 더욱 폼을 내려 의식하니 더욱 아이 같지 않아 보입니다.



솟구친 물이 그대로 얼어버렸습니다. 사진 찍히는 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우혁이가 멋있다고 먼저 포즈를 취합니다. 그리고 '아빠는 안찍어?' 그래서 저도 찍혔죠. 후후 사진 찍는 구도를 나름대로 알려주는 산교육이지요. 초등학교 1년 동안 방송반 활동을 한 우혁이라 제법 잘 찍어요.



함태초등학교 5학년 3월에 서울로 전학을 갔습니다. 생계를 위해 탄광촌으로 들어오신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문제를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였습니다. 당시 친구들은 대체로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대도시로 전학을 가곤 했지요. 저 역시 5학년때 홀로 서울에 남겨져 공부를 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도 12살 장남을 서울에 보낸 부모님의 열정이 놀랍기만 합니다. 과연 우혁이를 객지에 혼자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쉽지 않을 듯 합니다.


대학생이 된 82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이랑 갔던 당골. 그때 밤새 술잔 속에 유년의 추억을 되살렸었지요. 그때 정말 작아보였던 초등학교, 좁던 차길, 거의 흔적이 사라졌던 탄광촌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함태'는 함백산과 태백산 이름을 딴 것입니다. 사실 함백산이 해발고도가 더 높은데 두 산의 명성은 아주 다릅니다. 함백산 줄기는 바로 중생대 시절 석탄을 머금고 있지만 태백산은 그야말로 깨끗한 영지랍니다. 태백산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이슬이 모여, 흘러 흘러 낙동강의 발원이 되었지요.


그만큼 깨끗한 물이 잔잔하게 흐르던 당골계곡. 그러나, 함백산 물줄기는 까맣고 깊었습니다. 어린 우리들에게 깊다는 것은 그야말로 물놀이 천국이었지요. 한여름, 수영복도 없던 시절, 홀라당 다 벗고 풍덩 잠수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홍수때면 마치 성난 파도처럼 흘러가던 물살이 위험하기 그지 없기도 했던 기억도 떠오른 걸 보니 머리 속에 맺힌 기억이란 그만큼 대단한 가 봅니다.


우혁이가 놀랐죠. '아니 그렇게 새까만 물에서 수영을 해?'



여름이면 어김 없이 까만 계곡에서 헤엄쳐 놀 때면 산중턱을 지나가는 협궤 기차를 만나게 됩니다. 석탄을 실어나르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놀던 기억이지요.



어른 한명이 앉기에도 좀 좁은 운전석입니다. 우혁이도 이제 많이 커서 꽉 들어찬 느낌입니다.


함백산 계곡이 까만 흑색의 기억이라면, 태백산 당골계곡은 그야말로 새하얀 샘물의 기억이지요. 졸졸 흐르는 계곡에 대한 기억 하나를 우혁이에게 해줬지요. 할아버지는 광부이셨기에 가끔 일요일이면 서너 가족들이 개 한마리를 끌고 계곡으로 가곤 했단다고 말입니다.


개 한마리를 끌고 당골 계곡 넓고 안락한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아이들이 산 계곡에서 뛰놀고 있는 사이 어느새 따라왔던 개는 보이지 않고 큰 냄비에 맛 좋은 냄새가 풍기기 시작합니다. 어른들은 뛰놀던 아이들을 불러 입에다 넣어주기 시작합니다. 그 시절 이 세상 그 어떤 고기보다 더 맛 있는 건 없다는 듯 맛 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어른들은 갱 내에서 지친 거친 폐를 다스리기 위해 가끔 당골 계곡의 맑은 물로 끓인 보양식을 즐겼던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광부였다는 걸 알게 된 우혁이. 그 옛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슬쩍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저 듣기만 하다가 짧은 질문만 하곤 합니다. 이 석탄이 연탄이 되고 6~70년대 가장 중요한 연료이었다는 것을,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주는 좋은 물건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저렇게 긴 머리카락으로 멋을 부리면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80년대 초반 긴 머리를 휘날리며 대학교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때 제 모습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당골 옆에는 함태광업소가 있었습니다. 10년만에 내근을 하게 되신 아버지. 광업소 안에는 저 높고 큰 건물이 있었습니다. 석탄을 캐려면 수직 승강기를 타고 땅 속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승강기를 끌어 올리고 내리는 거대한 도르레.


우혁이가 처음 보는 물건들에게 그 뜻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 속에 담긴 아빠의 기억도 말입니다.


당시 아버지를 따라 광업소 목욕탕에 간 적이 있습니다. 광부들이 퇴근하기 전에 목욕을 하는 곳. 그곳에서 검은 옷을 벗고 맨살을 드러내는 아버지들을 보면서 같이 물장구를 치던 그 기억. 목숨 걸고 갱으로 들어가고 또 살아나오고 하는 그런 노동을, 그 가치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갑,을,병조 3교대, 8시간 내내 검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 머물던 아버지들이 자랑스러워 진 것은 아마도 대학생이 되고 난 후의 인식이었을 것입니다.



투명한 것 앞에서 늘 혼자 스스로를 찍었는데, 우혁이와 같이 섰습니다. 석탄박물관 속에는 석탄에 대한 많은 정보와 탄광촌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혁이에게 들려준 아빠의 기억도 담겨 있습니다.



중생대 시대 화석인 암모나이트 앞에서. 석탄박물관 지질관에는 화석들이 많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자연 상태 그대로 전시된 많은 화석, 광물들을 하나씩 같이 보고 설명해주면 아이들이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좀 어렵더군요. 지구과학 시간에 좀더 열심히 공부해 둘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석탄 채굴관에 있는 착암기입니다. 석탄을 채굴하는데 여러 도구들이 사용된다는 것을 우혁이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참 다양한 도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겠지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갱 속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수평으로 약200미터 정도 들어간 후 다시 지하로 100미터 이상 내려갑니다. 온통 어둠이 엄습하는 두려움으로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해 별로 기억이 많지 않지만, 힘든 노동의 현장이라는 느낌은 생생한 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갱 속은 전부 레일이 깔려 있습니다. 석탄을 비롯 광부를 실어날라야 하니 말입니다. 이런 갱내 자전거도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섬찟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제 인식에 깊게 자리잡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1984년, 저는 다시 입시를 거쳐 새로운 전공과 대학에서 1학년이었습니다. 4월, 4.19가 지나고 얼마 지나 대학신문사의 선배가 원고 청탁을 해왔습니다. 80년 사북사태에 관한 칼럼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써야 한다는 그 여자선배의 요청을 마다 하기 어려워 며칠 고민하다가 8매 분량의 원고를 넘겼습니다.


1984년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소위 대학자율화 조치를 통해 민주화 요구에 대한 사회적 분출을 막고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대학생들은 다소 열린 공간에서 진지한 담론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시기인 것입니다.


제가 광산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대학칼럼 난에 이름을 걸치게 됐습니다. 제가 그때 썼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80년 사북사태가 있었다. 흑과 백의 고향, 삶의 터전일 수 밖에 없는 탄광촌에는 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가난을 위해 오랫동안 살아왔건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회색빛 노을이 작은 언덕을 넘어간다. 언덕을 되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가족, 그들이 근대화의 숨은 힘이건만 사회는 늘 무관심했다. 매일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빛바랜 가로수와 앙상한 가지, 무심히 지나는 버스들을 볼때마다 검지만 하얗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대충 떠오는 기억입니다. 기사화된 후 선배 동기들에게 잔잔한 공감대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존경하던 선배가  '너가 쓴 글 봤다'라는 한마디에 삶의 용기가 넘쳤던 기억도 새록 떠오릅니다.


박물관 벽에 걸린 작품 속에서 레일 옆을 지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때 쓴 칼럼의 내용이 불쑥 되살아 났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자주 갱이 무너졌다는 기사가 참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안절부절하기도 했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박물관 광산안전관에 있는 사고 구호대입니다. 우혁이에게 갱 내 사고의 여러가지 유형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할아버지들이 고생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안전이야말로 생명입니다. "아빠! 오늘도 안전!" 을 보면서 우혁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땅을 파기 위해 폭파하고 갱이 무너지지 않게 사방을 광목으로 단단히 하고 레일을 깔고 또 석탄을 캐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광부들의 개인장비입니다. 완전무장 그 자체입니다.



석탄박물관이 참 잘 조성된 느낌이었습니다. 모두 8곳의 실내전시실이 있습니다. 지질관에서부터 석탄의 생성발견관, 채굴이용관, 광산안전관, 광산정책관을 지나왔습니다. 제6전시실은 탄광생활관이며 태백지역관, 체험갱도관까지 이어집니다.



탄광생활관에 이르니 정말 어린 시절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광부들 가족을 위해 집집마다 한채씩 사택이 제공됩니다. 모든 사택 마당에는 연탄창고가 있습니다. 이 시절 무상제공되는 것은 집과 연탄 외에도 두부가 있습니다.


함태광업소는 광부들 가족 건강을 위해 두부 공장을 짓고 무상으로 두부를 제공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하루에 두부 한 모와 바꿀 수 있는 두부전표를 들고 두부공장 심부름을 많이 했습니다. 연탄전표와 두부전표가 우리 가족에게는 아주 소중한 생명줄이기도 했습니다.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어울려 온사방 산과 들로 뛰어다니거나 다른 동네와 축구시합을 하다가 어둑어둑해져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지요. 그때마다 빨리 두부 타오지 않는다고 어머니에게 혼도 많이 났었지요. 아버지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이제는 집으로 가야할 시간이 된 것이지요.


작은 부엌을 거쳐 안방으로 들어가는 사택구조. 아버지가 퇴근해야 저녁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렸겠어요. 거의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퇴근하는 아버지가 단 1분이라도 늦으면 괜한 걱정도 하곤 했던 시절. 탄광생활관 곳곳에 기억이 푸릇푸릇합니다.


'아빠 옛날에 이렇게 살았어?' '그래! 그렇지'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기다리고 있는 곳은 체험갱도관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갱으로 연결되는 컨셉이 아주 좋아보였습니다.  



갱에서 도시락을 먹는 광부들입니다. 반찬은 주로 두부조림이겠지요. 육체의 노동을 유지하는 하얀 밥이 어두운 갱 속에서 빛납니다.  



착암기로 석탄을 캐고 있는 모습입니다.



작업반장과 광부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사고예방을 위해 반장의 작업지시에 맞서 거부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폭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고가 참 많이 난다고 합니다.



석탄 캐는 장비입니다. 체험갱도관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석탄을 캐는 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산촌의 유년시절 중 아픈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우혁이에게는 이야기해주지 못했지만 여전히 가슴 속에 깊게 패인 상처. 아물지도 아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 할머니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어머니, 우혁이에게는 할머니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5살 전후 어느 여름, 홍수로 계곡 물이 엄청 불어난 어느 날.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보이지 않자 급히 작은 하천으로 나갔고 막 떠내려가는 손자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고 어렵사리 구한 후 안고 나오다 넘어져 돌부리에 눈을 부딪혀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유년의 아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것은 점점 깊은 상처로 각인되기 시작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대학생 시절. 탄광촌에서의 기억과 할머니를 떠올리며 상처를 애써 지워보고자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작고한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균영씨가 심사를 했던 대학문학상에서 비록 당선은 되지 않았고 최종결선에만 올랐지만 '진지한 문제의식이 돋보이지만 대학생다운 참신함에서 다른 당선자에 미흡하다'는 평을 받긴 했지만 말입니다.


백색과 흑색이 뒤엉킨 유년의 기억, 할머니의 맑은 눈을 대신해 살아가며, 그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자전적 소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균영씨의 지적처럼 진지하다 못해 지루하고 암울한 기억만을 드러내려 했다는 자책이 듭니다.


어머니 역시 건강이 좋지 않을 나이가 되셨지만 여전히 할머니는 평생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들 우혁이를 데리고 오랜만에 태백산을 찾아 그 기억의 저편을 계속 찾았던가 봅니다.



우혁이가 태백석탄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아빠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무덤덤하게 아빠의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태백산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비록 유년 시절 12년을 보냈지만, 대학시절부터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시각의 바탕이었으며 정서의 훈훈한 기반인 곳이기도 합니다. 함태초등학교 교가처럼 함백산 태백산의 영이 감도는 곳에 아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즐겁기도 하고 뭔가 훌훌 털어내 보려고도 했던 이 여행은 오랫동안 또 기억할 일입니다.


우혁아, 재미있었어?


아들 딸과 함께 아빠가 태어난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