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참에서의 하룻밤, 서태후와 광서제는 서로 등 돌리는 사이?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허베이 서부 ① 장자커우 계명역과 난천고진 1421년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 천도를 선언했다. 수도 방위를 공고히 하고 몽골 민족의 남하를 방어할 목적으로 경사북방선(京師北防線)을 구축했다. ‘경사’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수도’라는 뜻이다. 만리장성 관문인 거용관(居庸關) 바깥으로 요새, 보루, 봉화대를 세웠다. 북방선 남쪽으로 자연스레 군사도로이자 무역로가 생겨났는데 경사북로(京師北路)라 부른다. 이 길을 따라 이자성 민란 군대가 하늘을 찌를 듯 깃발을 펄럭이며 수도로 진군했고 몽골계 오이라트 부족을 정벌하러 청나라 강희제의 전마(戰馬)가 출정했다. 1900년 8월 15일 새벽, 서방 8개 연합군이 침공하..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민족문화 4) 백두산 백두산! 여전히 중국 땅을 거쳐 갈 수 밖에 없는 민족의 영산이다. 통일은 둘째치고 북한 여행조차 어려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 매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찾는 백두산이다. 백두산을 오르는 길도 세 군데로 나눠져 있다. 남문, 서문, 북문이다. 보통 남파南坡, 서파西坡, 북파北坡라고 호칭한다. 자주 봉쇄되는 남파보다 서파에, 서파보다 천지까지 차량이 올라가는 북파에 사람이 많이 몰린다. 하루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입장 시간도 통제한다. 새벽부터 오후 마감까지 2~3시간 간격으로 입장 인원을 제한한다. 동시에 인원이 몰리지 않도록 조정하기 때문이다. {계속}
북경 자금성, 고궁박물관에 들어가면 늘 천안문광장을 가로질러 오문을 통과해 신무문까지 일직선으로 달린다.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의 웅장함에 질리고 건청궁, 교태전, 건녕궁의 정교함에 탄성을 지르고 어화원의 나무와 정자 그리고 가짜로 만든 산을 둘러보고는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그렇게 빠르게 1시간을 보내고 고궁을 다 봤다고 한다. 고공을 설명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것이 중국 인솔자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그만큼 설명을 듣자면 할말도 많고 적어도 명나라 이후 역사와 황실문화에 대해 해박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작 고궁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 중 한 곳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바로 구룡벽. 아홉마리 용을 새긴 화려한 벽을 보려면 옆길, 즉 건청문 앞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빠져야 한다. 경운문(景运门)을 ..
공중초원 가는 길에 허베이 이현(易县)에 있는 청서릉 문화투어를 진행했습니다. 광서제의 숭릉 지하궁을 관람하면서 청나라의 황릉, 그리고 역사와 문화를 조금 이해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청나라가 성경(盛京, 지금의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 후 순치제는 쭌화(遵化, 고궁 동쪽 125km) 시 마란위(马兰峪)에 중국 황실 능원을 조성했습니다. 이후 옹정제는 무덤에 사용되는 한백옥의 생산지와 가까운 곳인 이저우(易州, 지금의 이센, 고궁 서남쪽 135km) 융닝산(永宁山)에 새로이 황실 능원을 조성하게 됩니다. 이후 강희를 존경한 손자 건륭은 다시 부자가 한 곳에 능원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게 돼 교차로 능원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청 동릉과 청 서릉으로 나누어진 이유입니다. 1730년 옹정제의 태릉(泰陵..
[중국발품취재 2012 - 3] 500년 전 명나라 역참 흔적 그대로 남은 지밍이 허베이 위현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동북쪽으로 1시간 30분가면 줘루(涿鹿)가 나온다. 치우(蚩尤)의 '탁록대전' 신화로 유명하지만 역사적 근거는 없다. 황제의 성이니 샘이니 포장해 명승지가 있지만 허망한 발길이 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베이징을 떠나 서쪽으로 가는 첫 역참 마을이 있어 발걸음이 가볍다. 현에서 다시 30분 가량 가면 지밍산(雞鳴山)이 나타나는데 역참은 이 산자락 아래 있다.울퉁불퉁하게 바위들이 솟았고 나무 한 그루 없이 민둥산이 길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닭 울음' 우는 산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하다. 북위 시대 지리서 에 따르면 기원전 춘추시대 조(赵)나라를 세운 조양자(趙襄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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