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소 민란이 개척한 선하고도 28번째 마을에서 여성 특무를 양성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절강고진 ② 청양고촌과 입팔도고진 2009년 5월에 마오쩌둥의 장손 마오신위(毛新宇)가 저장에 있는 한 시골을 찾았다. 마오쩌둥의 고향은 서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후난의 사오산(韶山)이다. 당시 현역 군인인 손자가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원적지(祖籍) 방문을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천년고촌이자 모씨 집성촌이다. 항저우 서남쪽 300km 거리의 청양고촌(清漾古村)으로 간다. {계속}
1936년 '쌍십이사변'이라고 불리는 12월 12일 새벽, 장쉐량은 서북군 양후청과 공모해 시안사변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당 현종과 양귀비(양옥환)가 놀았다는 화청지 뒤쪽 얕은 산자락에 기거하던 장제스를 체포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시안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장제스의 독려로 서북군과 동북군은 마오쩌둥의 연안 홍군을 향해 진격했을 것이며 산베이(섬서성 북쪽) 일대는 포화가 난무했을 것이다. 대장정을 거쳐 안정적인 근거지를 확보한 공산당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후 아마 다시 감숙성이나 내몽골로 쫓겨났을 것이다. 제2차 국공합작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중국공략은 훨씬 손쉽게 진행됐을 것이 분명하다. 정말 장쉐량과 양후청의 ‘기습’은 ‘신의 한 수’라 할만했다. 적어도 당시 인민들의..
[중국발품취재73] 간저우 커자와 부교, 송나라 성벽, 장징궈 옛집 9월 7일 오전 장시(江西)성 남단 도시 간저우(赣州) 우룽춘(五龙村)에 있는 커자위엔(五龙客家园)를 찾았다. 가까운 거리이긴 하지만 시골 촌이라 버스편도 까다로워 택시를 탔다. 지도를 보니 택시가 멀리 돌아가는 느낌이다. 넓은 도로가 새로 조성됐다고 한다. 도착해서 보니 한참 도시개발이 진행되는 곳이다. 시 동남부 쪽에 있는 커자위엔 역시 새로 공사를 하고 있다. 정문 입구부터 공사 중이라 그런지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 오른편으로 커자 민가 이름인 룽쥐웨이(龙居围) 한 채가 보인다. 이곳은 광둥(广东) 메이현(梅县) 바이궁진(白宫镇)에 있는 민가 원형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제19차 세계 커자 회의(世客..
쑨원(孙文)의 호는 쭝산(中山)이다. 베이징 중산공원에는 쭝산탕(中山堂)이 있다. 이곳에는 전시실이 있는데, 그곳에 쑨원과 쏭칭링(宋庆龄)이 결혼 후 찍은 사진이 있다. 관심이 많았던 사진이라 반가움에 참 오래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쑨원에 대해서는 난징(南京) 쭝산링(中山陵)과 링구쓰(灵谷寺)에서도 자주 이야길 했다. 좀 지겨울 수 있으니 '쏭칭링' 집안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쭝산탕 전체를 다 잡아보려고 했건만 조금 윗부분이 없다. 이곳은 원래 셔지탄(社稷坛, 사직단)의 본당인 바이디엔(拜殿)이었다. 쑨원이 베이징에서 사망한 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바꾸고 그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단(坛)은 원래 제사를 올리던 제단을 말한다. 베이징 옛말에 '우탄빠먀오'(五坛八庙)가 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링구쓰(灵谷寺)는 아주 큰 사원이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그 규모는 변했지만 그 절터는 그대로 남아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링구쓰는 명나라 초기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만들어졌으나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으로 훼손됐다. 다만 우량디엔(无梁殿)만이 겨우 그 형체가 보존되었다. 웅장했던 우량디엔은 1930년대 국민당정부가 링구쓰 절터를 전몰장병의 묘지로 사용하면서 제를 올리는 링탕(灵堂)이었다가 지금은 씬하이꺼밍씨샹관(辛亥革命蜡像馆), 즉 실물 인형 전시관, 즉 밀랍관이 된 것이다. 씨샹관 왼편, 링구타(灵谷塔) 방향으로 가는 길에 취엔윈(泉韵)이라는 문이 하나 있다. '운이 솟는 샘'인가. 정말 운이 절로 나오는 운치 있는 글체다. 그 취엔윈 오른쪽으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
서안에는 중국 역사 상 유래가 없는 독특한 사건인 의 고장이다. 국민당의 장개석이 모택동 군대를 압박하던 시기에 발생한 은 일명 '12.12사변'(双十二事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1936년 12월12일, 동북군벌인 장학량이 서북군벌인 양호성 군대와 함께, 에 있던 장개석 공관을 습격해 체포한 사건이다. 당시, 장개석은 장학량과 양호성을 압박해 공산당 홍군 토벌에 나설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반일투쟁을 지양하고 오로지 홍군 토벌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나 장학량과 양호성은 선 반일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인 두 군벌은 의기투합하고 경계에 유리한 의 '오간청'에 머물던 장개석 공관으로 새벽2시 100여명의 군사와 함께 직접 작전에 나섰던 것이다. 는 유명한 온천지이면서, 양귀비와 당 현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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