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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도읍 '장안' 땅, 서안(西安)에 도착하자 '진시황병마용'을 본다는 설레임이 일었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유물이기도 했지만 사실, 서안에 온 진짜 이유는

작년(2005년) 12월 중국언론에 (한국언론도) 보도된 기사 때문이다.


"'병마용(兵馬俑)'은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기사 내용에 야릇한 흥미를 느꼈고

'홀로여행'을 기획하면서 '서안을 반드시'의 이유이기도 하다.


기사 내용과 '병마용'에서 보고 느낀 바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인 진경원씨는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건축전문가로서 진시황릉에 관련해 관심과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병마용'의 발견 지점을 듣고

고대황릉이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비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에 진시황의 매장무덤이 있다는 것에 최초의 의문을 가졌다.



서안 기차역에서 동쪽으로 버스로 약 1시간30분 가면 임동현에 도착한다.

보잘 것 없다는 진시황릉을 지나자마자 곧 '병마용' 박물관이 나타난다.


역시, 엄연히 진시황 동상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시황의 동상은 예전 산동성 영성시에서 본 것과 동작과 모습이 참 유사하다.

영성시에 있는 동상은 신하 2명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병마용'의 진시황 모습과 너무 똑같다.

영성시의 동상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자신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눈으로 확인하고자 가장 동쪽 땅인 영성에 이르렀고 이를 관광상품화했을 터이다.


하여간, '병마용'은 고대의 '룰'과 달리 진시황릉의 동쪽 방향에 있다.



버스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어야 박물관 입구에 도착한다.

세계문화유산의 명성답게 주변 조경은 아주 청결하고 푸르렀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90위엔(약1만2천원)이어서 놀랐다.

나중에 한 중국인에게 비싼 입장료에 대해 투덜거렸더니

'병마용'의 역사적 의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오히려 핀잔을 먹었다.


더구나, 중국 최초의 전국통일의 '영웅'으로서 그 자부심만 기억하면서

진시황의 중앙집권적 법치주의 아래 희생된 수많은 민중들의 고통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인터넷으로 '기사'를 찾아 보여줬더니 좀 조용해지긴 했다.


'병마용'은 1,2,3호 갱으로 나뉘어 있는데, 가장 큰 1호 갱 입구이다.



'병마용' 관람은 주로 아래를 내려다 봐야 한다.

무덤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규모의 전체를 웅장하게 보려주기 위해서인 거 같다.

다만, 피사체는 높이 있어야 위대해 보이는 것 아닌가.

얼핏 보면 '병마용'의 병사나 군마가 왜소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 피사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각양의 표정을 세밀하게 다 읽기에는 조금 어렵다.

그래서인지 길게 막아놓은 빨간 줄을 가위로 삭뚝 잘라버리고 싶었다.



정말 병사들의 얼굴은 무겁게 눈을 내려감고 있으나 제각각의 표정으로 살아있음이다.

그래도 당시 병사들의 머리 형태는 마치 하나 같지 않은가.


사람의 표정이야 제각각이나 그 외양은 당시의 생활 또는 군사문화를 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들의 모습이나 옷차림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1호갱 정면 맨 앞에서 역사의 무덤으로부터 되살아난 병사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1호갱 왼쪽으로 돌아, 보무도 당당하게 맨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모두가 발판 위에 서서 정면을 향해 있지만, 반드시 일사분란한 군대의 모습은 아니다.

목이 없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니, 떨어져 나간 목은 누구의 몫으로 사라져간 것일까.



병사들 뒤에 날씬한 군마가 질주를 멈춘 듯 서있다.

군마들이 끌던 마차는 2호 갱에서 발견됐다고 알려져 있는데, 갱 속에서는 보질 못했다.

다만, 갱 옆의 한 박물관에 모형 형태로 비치되어 있다.


진경원씨는 몇가지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가 1976년 서안을 찾아갔다.

서안의 박물관 담당자로부터 '병마용'이 진나라 통일 후

십몇년 지난 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 했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한 바, 병사들의 복장 양식과 마차의 바퀴가

진시황 시대의 그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복색(服色), 즉 옷색깔을 흑색으로 통일했는데

출토된 모든 병사들의 옷색깔은 전체적으로

빨강색과 녹색의 전투복에, 자주빛 남색의 바지 차림이었다.


진경원씨 생각에, 이는 진시황의 준엄한 명령을 어긴 처사라 볼 수 있기에

아마도 '병마용'은 진시황 당시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역사가 흘렀어도 그의 주장대로 병사들의 옷이 검은 색은 아닌 것 같다.



왼편으로 돌아 다시 오른편으로 오니, 맨 뒷편에 다섯마리 군마와 병사 하나가 외로이 서있다.

다섯마리 군마는 명령을 기다리는 태세이고, 병사는 마차를 진군할 자세가 아닌가.


또, 진경원씨가 의문을 가진 점은 바로 마차의 바퀴에 있다.

갱내를 조사한 결과, 마차의 바퀴형태가 서로 다 달랐다.


이 역시, '병마용'이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증거로서

진시황은 통일 이전에 이미 진나라 영토 내에서는

'차동궤(車同軌)' 바퀴가 아니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했다.


당연히 통일 후에는 모든 마차 바퀴를 하나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진시황은 도대체 어째서 자신의 무덤에 부하들 맘대로 바퀴를 만들도록 윤허했단 말인가.


진경원씨는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했다.



마치 역사의 진실을 기다리는 듯 정연하게 서있는 '병마용'의 병사들을 뒤로 하였다.

마침 일본 사진작가인 듯한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안정감 있게 좋은 사진을 만들어주었다.


병사들의 손동작이나 얼굴 표정 하나하나는 정말 살아있는 듯하다.

사방을 한바퀴 돌면서 진시황과 '병마용'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도 잊고

역사의 실체와 만나니 그 웅장함과 섬세함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이 거대한 1호 갱 외에도 2,3호 갱이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게 많다고 하니

이 엄청난 상상력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왜 나온 거란 말인가.



2호갱은 좀 작다. 하지만 그 깊이는 훨씬 깊고 또 대부분 목이 달아나서 야릇했다.

3호갱은 넓기는 한데, 대체로 '병마용'이라기 보다는 그냥 무덤에 가까웠다.



3호갱에는 출토된 '병마용'의 유물을 가깝게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보존상태가 좋은 것 중에서 유리로 감싸놓으니 정말 예술전시품처럼 아릅답다.


이때 갑자기, 한국에서 만난 적 있는 한 조각가가 조각의 개념을 바꿔

작품을 땅으로부터 출토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을 추구했던 게 생각났다.


'병마용'의 유물들이 이렇게 우리에게 미적 메시지를 전한다면

진정 고대 중국인들은 훌륭한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다만,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피정복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전리품인 것처럼

'병마용'의 주인이 누구인지와는 무관하게 '눈물의 예술'일 거라 짐작하게 한다.



마침 비가 오고 있다. 이슬비처럼 가늘지만 주위를 맑게 해주는 반가운 벗과도 같았다.

단정한 '병마용'의 아웃테리어에 한껏 운치를 북돋우는 해갈이었다.


그런데, 1,2,3호 갱을 다 보고 나오니 좀 허전한 감이 없지 않다.

따지고 보면, 수 없이 많은 병사와 군마만큼이나 많은 감동을 기대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은은해 검은 색의 퇴색으로 착각해 착시가 아닌가

눈 비비고 보고 또 봤던 것도 좀 영향이 있는 것 같다.  


'병마용' 박물관 내에는 상설전시관이 별도로 있는데

마침 당삼채(唐三彩) 전시가 있었는데,

당나라는 진시황과는 무관한 8세기 일이어서인지 영 흥분이 없었다.


더구나, 한 전시공간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방문사진이 잔뜩 있어서 짜증까지 난데다가

어라~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 지도자와 함께 '병마용' 무덤에 같이 묻힐려나 보다.



중국 지도자들이 세계 최강 미국 대통령을 무덤에 데려간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진경원씨의 문제의식은 중국 지도자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1974년 3월 24일 이 지역 농민이 밭을 갈다가 발견한 '병마용'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건축의 일부분'이라고 너무 빠른 결정을 내렸고

이를 취재한 중국 신화사는 5월 경 그 어떤 상세한 설명도 없이

'진시황릉에서 진나라 시대의 무사들의 무덤이 출토됐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를 중시한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이

국가문화재 담당부서(국가문물국)에 '병마용'을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지시를 했다.

그러자마자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단이 재빨리 현장 조사 후

주위에 진시황릉 외에는 대형 무덤이 없다는 이유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으로 단정해버렸다는 것이다.


진경원씨는 도대체 왜 황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순장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없었고

또는 '병마용'의 시대, 성질 등 과학적인 조사도 없이 결론을 내린 걸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된 배경에 대해

과학적이고 학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고

'병마용' 발굴이라는 세계사적 경사를

중앙집권적 통치의 상징이던 진시황과 연계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실제 주도한 사람은 바로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모택동의 부인으로

문화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강청의 지시로 이뤄졌다고 믿고 있다.


진경원씨는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일생을 바쳐 노력해왔다.

그는 자료 수집을 통해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중국사회과학원 간행물에 기고하기도 했으나 누구로부터도 동조를 받지 못했다.


1984년에는 스스로 조사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병마용'의 진짜 주인은 진선태후(秦宣太后)인 미씨(米氏)라고 밝혔다.

그는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진선태후는 바로 현재의 '병마용'의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고 기록돼 있으며

중국 <사기>를 근거로 진선태후는 진시황 이전 시대의 진소왕의 생모로

'초나라' 사람이었기에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옷색깔 등이

'진나라'가 아닌 소수민족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306년, 진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선태후가 섭정했고

선태후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신하에게 순장을 지시했으나

진소왕은 순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조각한 채 순용(殉俑)했던 것이다.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통해 자신의 생모가 평생 돌아가고자 하던

고향인 '초나라'로 귀향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만 담았다고 한다.


진경원씨의 이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주목 받지 못하고 잊혀졌다.

그는 퇴직 후 더욱 적극적으로 당시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최근에 이르러 점점 주변의 동의와 관심을 받고 있고

그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2005년 12월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역사는 역사답게 '무게'가 있어야 한다.

진시황은 중국인들에게 최초의 통일국가의 '영웅'으로 영화화되고 묘사되고 있다.

'분서갱유'와 '아방궁'도 있고 또하나의 세계적 불가사의 '만리장성'도 있다.

'병마용'의 진짜 주인이 확정되더라도 진시황은 아쉬울(?) 게 없지 않은가.


과연, 13억 중국인 중 한사람일 뿐인 진경원씨가 평생을 바쳐 온 노력이

진정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역사'만이 알 것이다.

'병마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제 주인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사실, 나 역시 진시황의 망령(?)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서안으로 가면서 흥분된 것은

기원전의 역사도 현대의 역사와 잇닿아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비를 맞고 되돌아오는 버스에서

훌륭한 조각품 '병마용'에 담긴 효성스런 진소왕의 마음이 한없이 고마웠다.


글|사진^여우위에 newonoff@한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