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강산 혁명근거지를 내려온 마오쩌둥, 문무를 겸비하라는 대련을 만나다[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장시 ③ 지안 징강산과 메이베이고촌 장시 중부에 위치한 지안은 여릉(廬陵), 길주(吉州)로 불렸고 원나라 때 지금 지안(吉安)으로 바뀐다. 1927년 가을 추수봉기에 실패한 마오쩌둥은 지안에 있는 징강산(井岡山)으로 후퇴한다. 공산당 첫 혁명근거지다. 지안에서 기차로 약 1시간, 다시 시내버스로 40분을 가면 징강산 입구다. 홍군 복장을 입은 단체 여행객이 많다. 비가 오락가락 한다. {계속}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 너무 간략해서 도무지 모르겠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강서 휘주문화 우위엔 ④ 샤오치와 리컹 밤 새워 험난한 길을 가는데 날이 밝아오면 얼마나 기쁠까? 이를 천강포효(天剛破曉)라고 한다. 당나라 말기 황소(黄巢) 민란이 전국을 휩쓸던 시기, 왕만오(汪萬五) 일가는 휘주부에서 장장 400리를 피난 내려왔다. 시냇물이 흐르고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풀과 꽃이 만발한 들판이자 비옥한 땅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짐을 풀었다. 9세기부터 정착했으니 그 어떤 천년고진 부럽지 않은 세월을 지녔다. '동이 트는 땅' 샤오치(曉起), 양생하(養生河)가 흘러 샤오촨(曉川)이라고도 불렀다. {계속}
1,2,3권만큼이나 4권 를 읽으면 중국 방방곡곡을 땀내 닦으며 걷던 기억들로 설렌다. 장쉐량张学良의 고향 션양沈阳의 장솨이푸张帅府와 ‘시안西安사변’의 총탄 자국, 그의 첫 연금 현장이자 장제스蒋介石의 고향 시커우溪口의 미륵보살 성지, 대장정의 종착지 옌안延安의 동굴 집 야오둥窑洞, 베이징 마올후퉁帽儿胡同에 있는 마지막 황후 완룽婉容의 고거,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의 창춘长春 위만황궁伪满皇宫 박물관, 동북항일연군의 만주벌판까지. 옴니버스로 엮은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책 속에 담긴 ‘중국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넘어갈수록 그들이 밟고 있던 ‘역사’ 속으로 물밀 듯이 나가고 싶어진다. 나의 중국문화답사기의 단골 메뉴이기도 한 장쉐량과 푸이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이니 어찌 흥분하지 않겠는가? ..
을 탐구한 한 중국인의 발길을 따라 '장안'으로 불리던 옛 도읍지, 서안(西安)에 도착하자 '진시황병마용'을 본다는 설렘이 일었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유물이기도 했지만 사실 서안에 온 진짜 이유가 2005년 11월 중국 언론에 보도된 기사 때문이다. 기사는 진경원이라는 중국인이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진경원씨의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면 세계적인 뉴스가 되겠지만 아직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며 중국 학계 역시 진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사 내용에 야릇한 흥미를 느꼈다. '홀로여행'을 기획하면서 서안에 반드시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진씨는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건축전문가로서 진시황릉..
중국고대도읍 '장안' 땅, 서안(西安)에 도착하자 '진시황병마용'을 본다는 설레임이 일었다.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유물이기도 했지만 사실, 서안에 온 진짜 이유는 작년(2005년) 12월 중국언론에 (한국언론도) 보도된 기사 때문이다. "'병마용(兵馬俑)'은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기사 내용에 야릇한 흥미를 느꼈고'홀로여행'을 기획하면서 '서안을 반드시'의 이유이기도 하다. 기사 내용과 '병마용'에서 보고 느낀 바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인 진경원씨는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건축전문가로서 진시황릉에 관련해 관심과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그런데, '병마용'의 발견 지점을 듣고고대황릉이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비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에 있고풍수지리적으로 어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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