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 수향에 신화와 과학이 만나고,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름을 바꾸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강남 수향 ① 루즈, 퉁리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도처의 신기한 동물을 모아 금수원(禽獸園)을 지었다. 어느 날 황제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동물을 보고 싶어 했다. 결국 고민 끝에 이종 교배를 단행했다. 몇 년 후 야생 소가 암수 한 쌍을 잉태했다. 코뿔소의 뿔, 사자의 몸, 용의 등, 곰의 손, 물고기의 비늘, 소의 꼬리를 지녔다. 뿔이 하나였고 중앙에 단정하다는 뜻으로 각단(角端)이라 이름을 짓고 보고를 했다. 크게 기뻐한 황제가 7획의 각에서 뿔 하나를 뗐다. 6획의 녹(甪)이 됐다. 신화 속 동물 녹단이 탄생했다. 오로지 하나의 마음으로 불편부당하지 않은 통치라는 상징으로 발전했다. 고궁 중화..

한단지몽의 도시에 잠든 조선인 열사의 꿈을 추모한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허베이 서부 ⑤ 창저우 오교잡기와 한단 황량몽여선사, 혁명열사능원 둔황 막고굴(莫高窟) 제156굴에 들어서면 양쪽에 벽화가 있다. 오른쪽에 위치한 북쪽 벽화가 송국부인출행도(宋國夫人出行圖)다. 왼쪽인 남쪽 벽화 장의조출행도(張議潮出行圖)와 대칭이다. 당나라 시대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 이후 786년에 토번(티베트)이 둔황을 점령한다. 62년이나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통치했다. 장의조가 토번을 쫓아내고 당나라에 귀의한다. 귀의군 절도사 장의조의 송국부인 행차다. 벽화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역사(力士)가 십(十) 자 모양의 긴 장대를 머리 위에 올리고 있다. 양 끝에 어린이 둘, 중간과 꼭대기에 하나씩 모두 4명이 재주를 ..

‘동방의 아름다운 신’이라 극찬한 루쉰의 관음보살은 어디에 있을까?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허베이 서부 ④ 스자좡 융흥사와 영국부 1901년에 일본인 사진작가가 베이징에 사진관을 열었다. 고궁 동쪽, 지금의 왕푸징(王府井) 부근이다. 사찰, 석굴, 궁전, 능원, 거리 등을 촬영했다. 사진도 팔았다. 1923년 베이징 고궁 서쪽에 살던 루쉰(魯迅)이 사진 한 장을 샀다. ‘동방미신(東方美神)’이라 경탄하고 액자까지 만들었다. 서재에 두고 1936년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감상했다. 루쉰은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20세기 최고의 문학가이자 사상가가 한 말이다. ‘아름다운 신’에 대한 극찬이다. 미인이 아니니 사람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일까? {계속}

배수진의 영웅 한신이 삼국지의 조조로 환생하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허베이 서부 ③ 바오딩 삼의궁과 만청한묘, 스자좡 포독채 정사 기록 어디에도 없다. 서민을 위한 소설에는 각색이 필요했다. 도원결의(桃園結義)다. 유비와 장비의 고향은 탁현(涿县). 관우는 고향 해현(解县)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해 나타난다. 소설에서 셋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동한 말기 황건군 민란을 일으킨 장각(張角), 장보((張寶), 장량(張梁) 형제가 먼저 등장한다. 유비, 관우, 장비 셋은 갑자기 의기투합했다. 장비가 제안했다. ‘우리 집 뒤쪽에 도원이 하나 있소. 꽃이 만발한 상태요. 내일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례 후 우리 셋이 형제 결의를 맺고 함께 힘을 합치면 대사를 도모할 수 있소’라 ..

한여름의 피서지 공중초원에서 본 개기일식, 태어나서 처음이야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허베이 서부 ② 장자커우 공중초원과 바오딩 청서릉 태행산(太行山)은 북위 34도에서 43도에 걸쳐 있다. 허난성 서부를 시작으로 허베이성 북부에 이르며 직선거리로 대략 750km다. 동경 110도에서 114도 사이다. 우리나라로 수평 이동하면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함경북도 김책시 앞바다까지’라 생각하면 된다. 서쪽은 고원이며 동쪽은 평원이다. 최고봉은 해발 3,061m의 오대산이다. 남북으로 1,000m 정도 고도 차이가 나는 가파른 산맥으로 명산이 줄줄이 이어진다. 융기와 침식을 거듭한 지각운동으로 산을 넘어가는 지렛목이 생겼다. 예로부터 팔형(八陘)이라 했다. 산맥을 가로지를 수 있는 험로가 여덟 곳이라는 말..

역참에서의 하룻밤, 서태후와 광서제는 서로 등 돌리는 사이?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허베이 서부 ① 장자커우 계명역과 난천고진 1421년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 천도를 선언했다. 수도 방위를 공고히 하고 몽골 민족의 남하를 방어할 목적으로 경사북방선(京師北防線)을 구축했다. ‘경사’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수도’라는 뜻이다. 만리장성 관문인 거용관(居庸關) 바깥으로 요새, 보루, 봉화대를 세웠다. 북방선 남쪽으로 자연스레 군사도로이자 무역로가 생겨났는데 경사북로(京師北路)라 부른다. 이 길을 따라 이자성 민란 군대가 하늘을 찌를 듯 깃발을 펄럭이며 수도로 진군했고 몽골계 오이라트 부족을 정벌하러 청나라 강희제의 전마(戰馬)가 출정했다. 1900년 8월 15일 새벽, 서방 8개 연합군이 침공하..

소의 심장 같은 휘주 마을 호반, 야경에 취해 이백의 권주가를 읊으며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휘주 문화 ⑤ 이현 노촌과 굉촌 드라마 “휘주여인(徽州女人)”이라고 있다. 청나라 말기 휘주를 주름잡던 상인인 정씨(程氏) 가문에 시집온 다섯 여인의 애절한 삶이 줄거리로 2007년에 방영됐다. 황산시 이현(黟县)의 노촌(卢村)이 촬영지다. 실제로도 노촌의 상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청나라 도광제 시대 휘주 갑부이자 염상인 노방섭(卢帮燮)이다. 10세기 후반 오대십국의 남당(南唐) 말년, 노씨 조상이 이주했다. 33대손 노방섭은 부인과 첩을 여럿 둘 정도로 재력과 위세가 등등했다. {계속}

당나라의 마지막 혈육, 낙엽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듯 휘주 상인의 조상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휘주 문화 ④ 황산시 둔계, 이현 서체 서쪽에서 횡강(横江)과 율수(率水)가 흘러온다. 신안강(新安江)과 만나 동쪽으로 흐른다. 세 강의 교차 지점에 둔계(屯溪)가 있다. 예로부터 동서남북 어디로도 연결되는 사통팔달이었다. 자연스레 상업이 꽃피던 휘주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1988년에 안후이 남부 3개의 구(区)와 4개의 현(县)을 묶어 황산시가 됐다. 둔계구에 시 정부가 위치한다. 여기에 라오제(老街)가 있어 휘주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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